남 · 정 · 옥
중국의 6·25전쟁 70주년 행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70주년 기념행사 연설을 통해 중공군의 참전 이유를 “제국주의 침략이 확장되는 것을 막고 신중국의 안전을 지키고, 중국 인민의 평화로운 생활을 보위하기 위함”이라고 밝히며, ‘항미원조전쟁’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 ‘평화의 승리’, ‘인민의 승리’라며 자화자찬했다. 여기에 중국 당국도 거들고 나섰다. 6·25전쟁 때 중공군의 출발기지였던 단둥(丹東)의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紀念館)을 기존보다 4배로 확장해 그들의 한국전 참전 이유를 ‘뻔뻔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중공군의 6·25전쟁 개입은 통일을 앞둔 우리 국민과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웠던 유엔군에게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중국과 소련의 강력한 지원과 후원 하에 북한이 일으킨 남침으로 대한민국의 운명은 그야말로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신세가 됐다. 전 국토의 10%밖에 안 되는 경상도 일부의 조그마한 지역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어린아이와 노인만 빼고 전 국민이 동원되어 총력전을 펼쳤다. ‘낙동강 사수(死守)’였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싸움이 1950년 8월과 9월을 달구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패색에 젖어 있던 국군과 유엔군은 생기를 되찾고 낙동강전선을 박차고 나갔다. 그 여세를 몰아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38도선을 돌파한 후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밤낮없이 북진(北進)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민족이 하나 되어 사는 통일뿐이었다. 대한민국과 유엔이 주도하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한국이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없던 힘도 절로 났다. 통일을 향한 신명나는 북진의 행군이었다. 국군6사단은 압록강에, 미7사단은 두만강에 다가섰다.
중공군의 ‘항미원조’는 그런 국군과 유엔군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슬그머니 압록강을 넘어 북한 땅에 들어온 중공군 30만 대군이 국군과 유엔군을 내리쳤다. 그때가 1950년 10월 25일이다. 이후 전쟁 상황은 완전 바뀌었다. 맥아더가 말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통한(痛恨)의 후퇴였다. 유엔총회는 그런 중국의 ‘불법 침략 행위’에 철퇴를 내리쳤다. “침략자”라고 낙인찍었다. 일찍이 유엔안보리는 북한의 남침을 국제평화를 파괴한 행위로 규정했다. 이에 유엔회원국 16개국이 북한의 침략을 응징하기 위해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그때부터 전쟁은 국제평화를 유지하려는 ‘유엔의 전쟁’이 됐다. 중국의 ‘항미원조’는 그런 유엔의 국제평화 유지 활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는 유엔의 국제평화유지에 반하는 범법행위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양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늦어도 1950년 12월이면 국군과 유엔군의 승리로 끝날 유엔의 국제평화유지 전쟁이 중공군 개입으로 31개월을 더 끌게 됐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물적 손실을 입게 됐다. 더욱 더 비극적인 일은 한반도가 통일되지 못하고 재 분단되는 것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얻게 된 휴전선은 우리 민족에게 고통과 비극의 산물로 변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우리 민족의 적대감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 비극의 ‘원흉(元兇)’은 바로 중국의 ‘항미원조’다.
그런데 중국은 그들의 6·25전쟁 70년 기념행사에서 70년 전에 꽂았던 통일방해의 비수(匕首)를 다시 꺼내 대한민국 국민과 국군의 심장부에 꽂고 있다. 이제 중국은 달라져야 한다. 21세기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미국과 견주는 G2국가가 됐음에도 중국의 역사인식과 인접국에 대한 배려는 과거 청나라 때의 제국주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덩치만 커졌지 그에 따른 선진국가로서의 역사의식 수준은 여전히 70년 전 ‘항미원조’ 시기의 후진국인 중국 모습 그대로다.
70년 전 중국의 마오쩌둥은 그들의 국내외 환경을 고려할 때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는 것보다 참전하는 것이 국익에 훨씬 이익이다”라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참전했다. 여기에는 많은 배경과 이유들이 있다. 참전당시 중국은 중국대륙을 공산화한지 1년밖에 안됐고, 그 과정에서 중국 곳곳에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잔존세력들이 남아 있어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고, 거기에 대만으로 쫓겨 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호시탐탐 중국대륙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그들의 최대 후원국인 소련의 경제적·군사적 지원 없이는 국가를 발전시킬 능력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 스탈린의 참전 권유를 물리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언제든지 대만의 장제스 정부와 손잡을 수 있는 미국과 1,000km가 넘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연하여 국경을 맞댄다는 것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마오쩌둥은 그것을 순망치한(脣亡齒寒)으로 표현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의미다. 북한의 불행은 북한으로만 끝나지 않고 중국과 직결된다는 것을 마오쩌둥은 간파했다. 결론은 누가 뭐라고 해도 참전이었다. 그것만이 중국의 살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허울 좋은 명분이었다. 중국은 선전포고 없이 국제평화를 유지하려는 유엔의 전쟁에 불법 개입한 것이다.
마오쩌둥에게 남은 숙제는 그럴듯한 참전 명분이었다. 전쟁명칭에서 그것을 찾았다.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북한을 돕는다”는 의미로 ‘항미원조’로 정했다. 그것은 전쟁의 주체를 미국과 중국 그리고 북한으로 제한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과 유엔을 제외시키는 꼼수를 부렸다. 중국은 그것을 ‘정의의 전쟁’으로 포장했다. 중공군은 그 깃발을 앞세우고 70년 전 압록강을 도둑고양이처럼 넘어들어와 대한민국의 통일을 방해하고, 유엔의 권위에 먹칠을 했다. 이제 중국은 대국(大國)답게 과거의 잘못된 것을 반성해야 된다. ‘항미원조’로 인해 70년 전 통일을 하지 못하고 아직도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가로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중국은 진심으로 사죄해야 된다. 그런 연후에야 진정한 한중협력의 평화시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도서연구실장 /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