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 량
하데스의 개 ‘케르베로스’
그리스 신화 속 저승은 ‘제우스(Zeus)’의 동생인 ‘하데스(Hades)’가 다스리는 암흑 속 음침한 황무지다. 사후 어렵사리 다섯 개의 강을 건너 겨우 도착한 저승에는, 갓 들어온 영혼들이 행여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개 ‘케르베로스(Cerberus)’가 철통같이 지킨다.
흥미로운 것은 첫 번째 강인 ‘통곡의 강’을 건너려면, 뱃사공 ‘카론 (Charon)’에게 뱃삯을 줘야 쉽게 건너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사자의 입속에 은전 한 개만은 꼭 넣어주려고 한다. 마지막 가는 저승길 그래도 쉽게 가라고...
그러나 뱃삯을 못 내더라도 건너갈 수는 있다. 단지 통곡의 강 주변을 100년 동안이나 어슬렁거리면서, 애타게 배를 탈 기회를 계속 엿봐야 한다는 고통이 따를 뿐이다. 그러니 돈이 없으면, 저승 가는 길도 이리저리 너무 황망하다.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Fyodor Dostoevsky)는 ‘先拂(선불)’인생이었다. 신문사에 소설 기고를 한다고 해놓고 아직 제목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는 상태에서 원고료를 무조건 선불로 받았다. 어쩌면 항상 빚에 쪼들렸던 그의 인생이, 그를 무작정 소설을 쓰게끔 만들었고 그 결과 본의 아니게 세계적인 대문호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돈이야말로 ‘주조된 자유다!’ 라고 외쳤다. 프랑스 돈 1백만 프랑을 가진 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그로부터 ‘부림’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가 자본주의를 욕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도스토옙스키는 돈이 부여하는 불평등관계야말로 인간을 분발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미덕’이라고 예기했다.
도스토옙스키와 칼 마르크스의 唯物觀(유물관)
도스토옙스키와 동시대에 태어난 ‘국제공산주의’ 창시자 마르크스 (Karl Marx)도 돈 사랑에는 유별났다. ‘세계에 대한 인간관계가 인간적 일 때, 비로소 사랑이 사랑답게, 신뢰가 신뢰답게 제대로 교환될 수 있다’는 유명한 자신의 말과는 달리, 일상 삶에서 마르크스는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그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강남좌파’ 정도로 불려 질 수 있는 이중적인 삶의 태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저런 기고로 받았던 돈 외에도, 친구인 엥겔스가 당시 고위 관료급에 준하는 ‘월급’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사치로 인한 궁핍은 극에 달했다.
과연 돈이란 무엇일까? 신이 선택받은 특별한 인간에게만 내려주는 운명적 은총인가? 절대 아니다. 하루에 평균 6천번 정도 생각하는 영장류인 인간이기에, 돈과 자본을 형성하고 또 이를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빈부의 기원’은 어디서부터일까? 먼 옛날 원시시대, 그 척박한 땅에서도 탁월하게 생각하는 한 인간은, 들소 떼들이 계곡사이에서 잘 모이는 지형지물들에 대한 분별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동료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들소들을 사냥하고, 나머지는 생포한 후 가축으로 길들였다.
지형지물을 파악하고 기후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던 한 인간은, 특별하고 영리했던 덕분에 그 후 동료들로부터 추앙받는 무리의 ‘리더’가 된다. 다시 말해 동료들을 고용해서 부리고 돈이 되는 가축을 많이 기를 수 있는 그 시대의 ‘富者(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通貨(통화)라는 악마의 유혹
무리를 이끄는 ‘부자’들이 씨족장으로 발전하고, 여러 씨족들이 연합해서 부족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정복을 통해 세력을 최대한으로 확대시킨 부족장들은 마침내 이런 저런 형태의 고대국가들을 만들게 되었다.
중세에는 화폐의 유통을 ‘악마의 유혹’처럼 간교한 일로 간주하는 ‘修道士(수도사)’들이 많았다. 이는 욕심에 눈이 멀어 사기와 기만으로 본래의 금전적 가치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량통화’를 유통시키는 왕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불성실한 교환의 주체인 불량통화는 국가내부 시장교란은 물론, 대외관계에서도 잦은 전쟁을 부르는 ‘독약’이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중세 당시에는 불량통화가 심각한 문젯거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런 저런 전쟁의 구실을 만들어서 약한 국가를 정복한 뒤, 자원과 재원을 도적질해오면 그것이 더 큰 성공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발전은 ‘점진적’이기보다는 ‘계단식’으로 급 발전했다.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재원과 자원을 축척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남의 것을 빼앗아 (Exploitation) 활용하는 것이었다. 돈을 한곳에 가두는 ‘시장의 혁명’과 ‘산업혁명’은 그렇게 갑자기 인류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다주었다.
유럽의 길목을 장악한 도시들과 돈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일단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이 생기고, 길이 생기면 그 위에 도시가 형성되었다. 중세 도시국가들은 모든 유럽의 길목들을 장악했고, 교역을 통해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유럽전역에 근대국가 형성을 위한 새로운 변화의 바람들을 불러 일으켰다.
영세중립국 스위스의 傭兵(용병)
유럽 지도 한가운데 위치해 있는 스위스는 유럽의 돈을 지켜내는 핵심지역이 되었다. 온통 높은 산악지대로 형성된 스위스는 대규모 군대가 일시에 쳐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 굳이 쳐들어 간다하더라도 들어간 비용대비 효과가 너무나 떨어진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소위 길목을 지키고, 통행세를 받아내는 무리배들은 일단 싸움을 잘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행인들 그 누구도 통행세를 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스위스 용병들의 몸값이 가장 비쌌다. 산악지대에서 단련된 강인한 체력으로 게릴라전을 통해서 좁은 협곡들을 지켜내는 용맹한 스위스 병사들의 위세는, 요즘 영화로 각광받는 ‘스파르타의 300 용사’와 비슷했을 것이다.
스위스는 그렇게 받아낼 것과 지켜줄 것을 지킴으로써 유럽의 돈을 담아두는, 아니 현재로서는 전 세계의 돈을 담아두는 스위스 은행국가가 되었다. 2차 대전 직전 좁은 땅덩어리에 얼마 되지 않는 국민수를 깔보고 히틀러가 스위스를 쉽게 넘보다가 혼줄이 났던 사실은 유명하다.
지금도 스위스 국민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자식을 위한 ‘소총’을 구입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내 가족과 내 고향은 내가 지킨다는 스위스국민들의 '전사의지'(Virtus)는 지금도 세계 제일이다. 자신들의 돈을 잘 지켜내려면 최소한 스위스 국민 정도는 돼야한다.
돈과 관련해서 신화, 사상가의 사생활, 국가의 기원, 도시국가의 탄생, 스위스의 돈 등등,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돈의 위력과 가치를 놓고 이런 저런 적잖은 사례들을 들어보았다. 그만큼 인간에게 돈이라는 ‘公共財(공공재)’는 인간의 본성에서 ‘이기심’과 ‘이타심’을 동시에 가름해야 하는 희한한 ‘마력’을 지닌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돈이라는 마술피리를 불어대면, 평상시에 그렇게 점잖고 우아한 채하던 고상한 사람들도 일시에 피리소리를 따라가는 ‘쥐떼’에 합류한다.
그 끝이 절벽이던지 아니면 깊은 강물속이든지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일단 오감에 잡히는 돈이 주는 ‘쾌락’을 먼저 찾으려고 한다.
利己心(이기심)과 利他心(이타심)
돈이 ‘공공재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인류역사 속에서 가장 유혹성이 강한 불안정한 존재를,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보았던 현명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市場(시장)’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서 그 속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돈을 벌고자 하는 인간의 극단적인 이기심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최고의 利他的(이타적)인 물건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도록 거의 강제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이타적으로 만들었다. 바로 ‘시장이란 역동성이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이 동시에 작동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쟁’이라는 향신료는 덤으로 선물 받았다.
‘시장원칙’을 떠난 돈은 곧바로 ‘괴물’이 된다. 인간의 선한 마음이 얼마나 허영심, 시기심, 자만심, 질투심 등으로 쉽게 망가지는 지는, 지금까지 인류사속 돈의 역사와 역할이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는다.
문재인 정권이 국민의 세금을 마치 자기 돈 인양 무차별적으로 내던지고 있다. 지난해 4.15총선 당시 돈 살포로 재미를 보았는지, 이제는 국민들에게 ‘돈 포퓰리즘’이란 ‘아편’을 강제로 먹이려 한다.
‘우한 코로나’ 핑계로 들이대는 돈 살포 이외에도, 무슨 친환경 뉴딜정책이란 듣도 보도 못한 사업으로 향후 특정지역에 몇 십조를 뿌릴 예정이란다. 거기다가 이재명 경기지사의 행태는 한술 더해 현금을 매일 살포하다시피 하고 있다.
문정권의 판도라 상자
한때 문대통령이 ‘판도라’라는 원전사고 영화를 보고 탈 원전에 박차를 가했다는 사실은 이제 뉴스거리도 아니다. 최근 드러난 대북 원전지원 여적혐의와 함께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문정권의 비리들이 정말 대한민국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다.
전남지역 6군데 군 지역사람들이 문정권의 조 단위 규모의 풍력, 태양광 시설지원사업을 거부하고 나섰다는 어이없는 뉴스에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기가 막힌다. 더 기가 찬 것은 이들의 반대이유가 문정권이 지원하는 재정과 연관되어 특정사업과 특정기업가가 서로 결탁해서 그들의 배만 불리는 사업진행이기 때문이란다.
‘돈 철학’ 없는, 단지 거짓과 사기와 기만에 능한 얼치기 위정자들을 만나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위대한 ‘자유대한민국號’ 가 지금 침몰하고 있다.
<한국국가전략포럼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