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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서 열린 EU-우크라이나 외무장관 회의 |
유럽연합(EU)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단죄하기 위한 특별재판소 설립에 본격 착수했다. 특히 이번 재판소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뿐 아니라 그를 도운 북한과 벨라루스 고위 지도부도 겨냥할 수 있어 주목된다.
EU 집행위원회와 유럽평의회, 우크라이나 정부는 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르비우에서 ‘우크라이나 침략범죄를 위한 특별재판소’ 설립안을 공동 발표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공식 요청 3년 만의 성과로, 영국을 포함한 40개국 이상이 지지를 표명했다. 설립안은 오는 14일 유럽평의회 외무장관회의에서 공식 투표에 부쳐질 예정이며, 3분의 2 이상 찬성 시 설립 절차에 들어간다.
EU는 “이번 재판소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관할권이 미치지 못하는 침략 범죄를 다루게 된다”며 “네덜란드 헤이그에 본부를 두고 정부 및 군 수뇌부의 범죄를 집중 조사·기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ICC는 전쟁범죄 기소를 위해 당사국의 조약 가입이 필수지만, 러시아는 이미 ICC 협약에서 탈퇴한 상태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2022년 4월 부차 학살 사건 이후 국제사회에 독자적 특별재판소 설립을 요구해 왔다.
이번 재판소는 단순한 전쟁범죄가 아닌 '침략범죄'—즉, 타국 침공 또는 정치·군사적 지배 시도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며, 최대 종신형 및 자산 몰수 등 강력한 처벌을 가능케 한다.
이에 따라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군 수뇌부뿐 아니라, 전쟁을 지원한 북한 김정은 정권, 벨라루스 루카셴코 정권의 핵심 인사들 약 20명이 잠재적 기소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법적 제약도 남아 있다. 유럽 정치 전문지 ‘유락티브’가 입수한 재판소 규정 초안에 따르면, 재직 중인 국가 수뇌부는 면책특권에 따라 기소가 일시 정지되며, 퇴임 이후에야 재개될 수 있다. 또 유엔 안보리 결의로 면책 해제가 가능하나,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 가능성이 여전히 걸림돌이다.
미국의 참여 여부도 주요 변수다. 바이든 행정부는 특별재판소 설계 과정에 수차례 참석했으나, 트럼프 행정부는 지금까지 관련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최근 트럼프 측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강경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어, 유럽 내에서는 미국이 반대할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도 나온다.
EU 고위 관계자는 “과거 트럼프 행정부가 ICC에 강경했던 이유는 이스라엘 수사 때문이었지, 우크라이나 관련 국제 재판소에 본질적 반대 입장은 아니었다”며 “미국도 향후 협력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재판소 설립 계획은 EU 창립의 기초가 된 ‘슈만 선언’ 75주년을 기념하는 ‘유럽의 날’에 맞춰 발표됐으며, 이는 같은 날 러시아가 대규모 전승절 열병식을 개최한 것에 맞선 정치적 메시지로도 읽힌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엑스(X·옛 트위터)에서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이 특별재판소 설립에 지지와 연대를 보내줄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하며, 오는 10일 우크라이나에서 유럽 중심의 안보협의체인 ‘의지의 연합’ 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재판소 설립이 실제 기소로 이어지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으나, 러시아의 침략에 대한 정치·법적 책임을 명확히 묻겠다는 유럽의 의지는 전 세계에 강력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김·성·일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