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4] 기독교 유럽을 구하라 ②
  • 에릭 제무르 (Éric Zemmour is a writer and former candidate for the presidency of the French Republic.)
  • 베를린 한 복판에 있는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  인터넷 캡쳐
    베를린 한 복판에 있는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 - 인터넷 캡쳐

    ‘유대-기독교’라는 개념은 양쪽 종교의 참된 신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대인은 신이 사람이 된다는 ‘스캔들’을 절대 수용할 수 없었고,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눈먼 자들로 여겼습니다.

    이 긴장은 2천 년에 걸친 가톨릭 역사 속에서 반복되었습니다. 로마 교회가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현하려 할 때마다, 화려한 의식과 위계제도, 선행에 대한 보상을 둘러싼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다양한 이단 운동과 종교개혁, 얀세니즘은 이러한 저항의 결과였습니다.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주인이 되었고, ‘진정한 이스라엘’이자 ‘새로운 선택된 민족’으로 자처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체성이 유대인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240년 파리 논쟁에서는 개종한 기독교인이 탈무드를 모독이라고 고발했고, 결국 1만 권의 히브리어 문서가 파리 한복판에서 불탔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의 찬송가인 시편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유대인의 책들이 불탔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은 또 하나의 뿌리인 그리스-로마 고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유럽의 정체성은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의 긴장에서 다시 한번 불타올랐습니다.

    19세기에는 민족주의가 유럽을 분할했습니다. 각국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의 유대적 기원은 다시 껄끄러운 화두가 되었고, 유대인은 자본주의·도시·개인주의·현대성의 상징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유대인은 마르크스주의와도 동일시되었습니다.

    그 끝은 홀로코스트와 600만 유럽 유대인의 죽음이었습니다. 가톨릭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았고, 1950년대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등을 통해 반유대주의를 숙청하려 했습니다. 동시에 유럽 교회들은 먼 나라에서 오는 이민자들을 무조건 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치에 의해 박해받던 유대인과의 유사성이라는 논리를 내세운 것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유대 랍비들이 이 '속죄의 연대'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와 이후에는 ‘각성한 좌파(woke left)’의 유용한 바보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응은 유럽과 기독교 자체를 변화시켰습니다. 혼란은 안팎에서 왔습니다. 바티칸 공의회는 로마에서 시작된 반란이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신자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더 이상 익숙하지 않다고 느꼈고, 가톨릭이 개신교화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악령이 오랜 갈등을 다시 깨운 듯했습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기독교는 예수의 성육신 교리를 통해 유대교와의 탯줄을 끊었습니다. 몇 세기 후,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무함마드는 아리우스주의의 후예들과 접촉했고, 그들과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슬람은 기독교에서 ‘신의 형상’이라는 교리를 제거하고, 세속적 요소를 배제한 순수한 셈족의 일신교를 복원하려 했습니다.

    각 종교는 자신이 뿌리내린 지역의 특성을 흡수했습니다. 유대교는 일상의 행동을 엄격히 규정하면서 교리에 대한 자유로운 논쟁을 허용했습니다. 기독교는 일상은 자유롭게 하되 교리는 절대시했습니다. 이슬람은 둘 다 금지했습니다. 교리를 논쟁할 수도 없고, 돼지고기도 먹을 수 없습니다.

    르낭은 1883년 강연에서 “이슬람은 정신적·세속적 권위의 분리 없는 통합이며, 인류가 경험한 가장 무거운 사슬”이라 표현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의 ‘종교 간 대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당신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랭 베상송은 교회가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앞에서도 똑같은 착각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이슬람은 신이 있는 공산주의”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개인의 존엄을 지켜주는 유일한 전통임을 강조했습니다. 유대교가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쳤다면, 기독교는 그 형상을 개별 영혼 속에서 꽃피우도록 했습니다.

    서유럽이 일찍이 ‘개인’의 고향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근대 국가는 개인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가를 만든 것입니다. 이 질서를 조직하는 책임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정치 질서의 기원』에서 “기독교 그 자체보다 서방 기독교의 제도적 구조가 정치 발전에 결정적이었다”고 말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유럽 전체를 하나의 문명으로 만들었습니다. 유럽 문화는 교회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유럽은 ‘기독교적 개인주의’의 극단에 도달했습니다. 그 결과는 뿌리도 전통도 없이 떠도는 유목민의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는 외부인을 통합할 수 없습니다. <계속>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교회'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5-25 07:10]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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