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7] 미국은 신조(信條)의 국가인가? ②
  • 데이비드 P. 골드먼 David P. Goldman is deputy editor of Asia Times and a Washington Fellow of the Claremont Institute.
  • 허클베리 핀 작품의 배경인 미시시피강  인터넷 캡쳐
    『허클베리 핀』작품의 배경인 미시시피강 - 인터넷 캡쳐

    건국의 아버지들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열정에서 비롯된 결단으로 그들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신성한 명예를 바쳤다. ‘언덕 위의 새로운 도시’와 ‘광야 속 새로운 사명’이라는 비전은 종교적 신앙의 표현이었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개인적 희생을 이끌어낸 원천이었다.

    출판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누리던 재산 소유자들이 이처럼 무장을 들고 일어난 사례는 역사상 유례가 없다. 그리고 네 세대 후, 북부의 시민 50만 명 가까이가 노예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미국을 단지 하나의 명제로 축소하는 것은, 어떤 국가든 그 명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전제를 뜻한다. 이러한 착각은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의 핵심 개념이며, 바로 이 사고방식이 미국의 민주주의 수출 시도―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비극적인 개입―에 영향을 주었다.

    문화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화’란 무엇인가? 미국 문화 해석의 대표 주자인 러셀 커크(Russell Kirk)는 T. S. 엘리엇의 정의를 인용한다:

    “‘문화’라는 용어는 한 민족의 모든 특징적인 활동과 관심사를 포함한다: 더비 경마, 헨리 보트 대회, 카우스 요트 대회, 8월 12일 사냥 시즌 개막일, 축구 결승전, 개 경주, 핀볼, 다트판, 웬즐리데일 치즈, 조각낸 삶은 양배추, 식초에 절인 비트, 19세기 고딕 양식 교회들, 그리고 엘가의 음악.”

    미국적 맥락에서 이런 나열은 결국 우스꽝스러운 수준의 축소일 뿐이다. 마치 오래된 광고 문구인 “야구, 핫도그, 애플파이, 그리고 셰비(쉐보레)”처럼 말이다. 그러나 미국 문화는 오히려 정의하기 쉬운 편이다. 전 세계 문화 중 유일하게 ‘단일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된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의 구원의 여정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 여정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청교도 창립자들의 반율법주의적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대중문학 전반에 밈(meme)처럼 퍼졌다. 『허클베리 핀』에서 『용서받지 못한 자』(William Munny)까지, 우리 문학과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속 기독교인(Christian)의 사촌들이다. 단, 중요한 차이가 있다. ‘미국의 순례자는 결코 천상의 도시에 도달할 수 없다.’

    헤밍웨이는 “현대 미국 문학은 모두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에서 출발한다”고 정확히 지적했다. 트웨인은 우리에게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허크와 짐, 두 탈출자가 미 대륙을 가르는 거대한 강 위에서 뗏목을 타고 떠도는 모습―를 남겼다. 대부분의 평론은 이 명백한 사실을 놓친다. 리오넬 트릴링은 허크를 “강의 신의 하인”이라고 설명하며 엉뚱한 해석을 했고, 해럴드 블룸은 허크가 “완전히 세속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미국의 오르페우스(Orphic)인가?”라고 질문했다.

    하지만 트웨인은 허크가 버니언의 『천로역정』 속 기독교인의 후계자라는 점을 직접 언급한다. 이 사실은 2018년 『마크 트웨인 저널』에 실린 리암 퍼든(Liam Purdon)의 논문에 잘 정리되어 있다. 허크가 그레인저포드 가족에게 머물게 되었을 때 그는 두 권의 책을 발견한다. “하나는 그림이 가득한 큰 가족 성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천로역정』이었다. 어떤 남자가 가족을 떠나는 이야기인데, 이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가끔 읽었는데, 내용이 흥미롭긴 해도 어려웠다.”

    그러나 버니언의 기독교인과는 달리, 미국의 순례자는 여정을 완주하지 못한다. 언덕 위의 도시는 무한의 소실점처럼 저 멀리 반짝일 뿐, 지상의 정치가 걷는 길로는 닿을 수 없다. 영국인은 자신들의 푸르고 아름다운 땅에 예루살렘을 재건하겠다고 노래하지만, 미국인은 천상의 도시는 인간의 길로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유럽의 모든 민족은 그들의 역사 속 어느 시점에서든 이스라엘의 선민 개념을 자신들의 민족성에 대입하려 했다. 그러나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이러한 민족적 자만(mania)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우리는 “거의 선민(almost Chosen)”일 뿐, 결코 선택받은 민족이 아니다.
    우리의 영웅은 다윗 왕조의 후계자가 아니라, 외로운 여정 속에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가련한 나그네일 뿐이다. <계속>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교회'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5-28 08:39]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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