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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천안문 어머니' 장셴링 |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습니까? 저는 단지 제 아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 진실을 세상에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올해로 36주년을 맞는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 사건을 앞두고, 희생자 유가족 단체인 ‘천안문 어머니회’의 발기인 중 한 명인 장셴링(88) 씨가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휠체어에 의지할 만큼 노쇠한 그녀는 여전히 중국 당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으며, 자신이 "국가의 위협이 될 정도로 두려운 존재인가"라고 반문했다.
장씨는 “건강이 허락된다면 6월 4일 새벽, 만안공묘를 찾아 아들 왕난에게 참배할 것”이라며, “내가 죽기 전 반드시 6.4의 진실을 세상에 전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다짐했다.
▣ “전화 끊기고 위치 감시…매년 반복되는 국가의 공포정치”
장씨는 매년 6월이 다가오면 휴대전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외부와의 통신이 막힌다고 말했다. 실제로 작년 6월 4일 전날에는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올해 4월 외지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감시 대상이 되었고, 지금도 관리가 느슨하지 않다고 말했다.
중국 당국은 “민감한 시기”라는 이유로 고령의 유가족들을 외부와 단절시키고 있다. 천안문 어머니회는 매년 6월 제문과 공개 서한을 발표해 사건 진상 공개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으며, 이는 공산당 당국의 탄압 이유로 작용해왔다.
▣ "군복 입은 아들, 군인으로 오인당해 총격 사망"
장씨의 아들 왕난은 당시 19세의 고등학생이었다. 1989년 6월 3일 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자전거를 타고 톈안먼 광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새벽 1시경, 인민대회당 북측 남장가 입구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병사들은 중상을 입은 그를 도우려는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며 협박했고, 결국 왕난은 새벽 3시 반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계엄군에 의해 다른 시신들과 함께 베이징시 28중학교 앞 잔디밭에 임시 매장되었다. 폭우로 시신이 드러나 악취가 퍼지자 학교 측과 협의 끝에 다시 수습되었고, 그의 유골은 현재 만안공묘 납골당에 안치돼 있다.
▣ "말할 수 없는 자, 침묵을 강요당한 자"
천안문 어머니회의 또 다른 대표 인물인 딩쯔린 여사에게도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은 닿지 않았다고 한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딩 여사는 건강은 유지하고 있지만, 청력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전화 통화가 어렵고, 공적인 발언도 중단된 상태다.
중국 공산당 당국은 사건 발생 3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가족들의 입을 막고 진상 규명을 철저히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장셴링 씨와 같은 ‘천안문의 어머니들’은 침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꺾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 저는 그날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그리고 그날, 제 아들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춘 <취재기자>
※편집자 주 :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과 학생 수천 명이 계엄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이른바 ‘6.4 사건’은 지금까지도 중국 내에서 철저히 금기시되고 있는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