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2] 그리스도 교회의 비정치적 정치
  • 피터 J. 레이서트 Peter J. Leithart is president of the Theopolis Institute, Birmingham, Alabama. He posts regularly at his Substack, Notes from Beth-Elim.
  • 어부의 반지를 끼고 있는 교황 레오 14세
    '어부의 반지'를 끼고 있는 교황 레오 14세

    내가 속한 기독교 세계의 작은 모퉁이에서는 모두가 정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의 변형과 함의에 대해 그렇다. 모든 것이 정치 신학과 논평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나의 이 작은 모퉁이만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을 포함해 다양한 분파의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몰두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황 레오 14세를 좌우 정치 스펙트럼 어디쯤에 위치시키려는 유치한 본능을 보라. 마치 기후 변화, 총기 규제, 이민, 트럼프-밴스 지지 여부가 정통 신앙의 새로운 기준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정치 집착은 정치적 관점에서도 근시안적이다. 수세기에 걸쳐 교회가 이루어낸 가장 통찰력 있고 지속적인 정치적 성과들은 노골적인 정치 해설이나 이론이 아니라, 기본적인 신앙 고백과 전례 관행에 대한 충실함에 의존해 왔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비정치적이었다. 일부 사제들은 교회가 정치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렇게 정치에 무관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국제적 제국이 되어가면서 정치 사상과 삶을 새롭게 만들었다. 비록 뚜렷한 수도, 군대, 가시적인 황제가 없었지만 말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 삶의 중심에는 새로운 의례가 있었으니, 바로 희생이 아닌 희생, ‘성찬(Eucharist)’이었다.

    고대 정치 질서의 기반은 희생이었으며, 희생의 장소와 정의를 재정립하고 성찬을 유일한 참된 희생으로 공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과 비잔틴 질서의 초석 중 하나였다.

    채드 펙놀드가 ‘기독교와 정치’에 쓴 것처럼, 주님의 만찬에 모인 공동체는 “모든 민족적 국경을 넘어” “추상적이지도 않고 강압이나 강제에 의해 이루어진 것도 아닌”, 그러나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정치적 충성”의 깊이를 이루는 단합을 이루어 냈다. 교회는 성체성사를 통해 “'제국'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이해조차도 경쟁할 수 없는 초월적 비전”을 의식적으로 제정했다. 로마의 제국주의에 담대하게 저항한 순교자들은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찬에 참여했다. ‘여러분의 희생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교회의 자기 인식은 성경을 유형론적으로 읽는 데서 형성되었다. 교회의 가르침과 상상력 안에서 고대 이스라엘은 약속과 성취, 또는 하느님의 통치라는 단일 역사 속의 여러 단계로서 교회 안에서 성숙에 이르렀다. 하느님의 백성은 세상 속 여러 권력 구조 안에 존재했던 이스라엘처럼, 그 공적(公的) 구성 방식이 독특했다. 콘스탄틴과 카롤루스 대제 같은 왕들은 결국 다윗과 솔로몬에 비유되었지만, 엄밀히 말해 다윗의 참된 대응물(antitype)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황제들이 다윗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기 위해서는 먼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가 되어야 했다.

    비잔티움의 메타정치에서 종말론은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다. 알렉산데르 슈메만에 따르면, 비잔티움 사상에는 교회와 국가를 고정적·공간적으로 구분할 여지가 없었으며, 대신 교회와 세계를 시간적·종말론적으로 구별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세계는 그 제도와 구조 모두 본래 선하지만, 그 기원과 목적을 이루시는 하느님과 단절될 때 악마적이 된다. 세계를 ‘세속적인 것’, 곧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은 원죄의 정의나 다름없다. 그러나 세계가 언제까지나 스스로의 좁은 종말론적 지평 안에 갇혀 있도록 운명지어진 것은 아니다. 교회는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자 성사로서 세계 속에 들어오며,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은 세계를 구속, 곧 그 나라를 향하도록 재지향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종말론적 관점은 비잔티움 정치신학의 기초였다. 슈메만은 『교회, 세계, 선교』에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이 세상 통치자’의 권세 아래 있을 수 있지만… 국가가 하느님 나라를 자신의 궁극적 가치, 즉 ‘eschaton(하느님의 심판과 새 세상이 도래하는 것을 의미)’로 ‘수용’할 때 긍정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썼다. 국가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한에서만 그리스도교 국가가 된다. 그리스도교 국가는 절대적 가치나 목적, 최종 목적이 되기를 거부함으로써만 진정한 가치를 얻고, “하느님 나라라는 유일한 절대 가치에 종속됨”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 곧, 그리스도교 국가는 역사를 멈출 수 있다는 바벨적 환상을 거부하는 국가다.

    이로써 교회의 공적 위상은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교회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는 로마 제국의 균형을 뒤흔든 이질적 존재, 낯선 변수였다. 종교개혁 이후 분열된 서방 교회는 새로이 부상하던 민족국가들에게 고대 폴리스나 로마 제국의 시민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 통치 체제의 종교적 지지대로 전락했다. 교회는 길들이기 당했고, 신비체(corpus mysticum)의 거룩함은 점차—때로는 명시적으로—민족이나 국가로 이전되었다. 현대 정치는 그리스도교의 교회론, 성찬례 관습, 종말론이 제공한 메타정치적 기여 없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동시에 현대 정치 질서는 기독교 국체를 부정함으로써 정의된다.

    서구 정치 생활은 교회의 자궁에서 태동했다. 그리스도의 역사 해석, 성찬례적 예배와 자선, 그리고 세계의 미래 회심(改心)에 대한 교회의 희망이 이를 길러냈다. 이러한 메타정치적 시각을 회복하는 일은 어떤 순수한 정치 프로그램이나 운동보다 우리의 정치적 미래에 결정적이다. 그리스도교는 정치에 집착함으로써 정치 세계를 변혁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와 그의 테이블, 그리고 그의 신부인 교회에 몰두함으로써만 변혁을 이룰 수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교회'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6-02 08:46]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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