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기 위해, 다시 말해 세상 안에 있으되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나아가야 할까? 故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악마와 대화”할 정도로 순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누가 우리 시대의 가장 어두운 ‘변방’에 그리스도의 빛을 가져다줄 것인가?
문화 전선에서의 복음화 노력은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하며, 신앙적 참여와 죄악에 대한 참여 사이의 경계가 비교적 분명하다. 하지만 기술 분야는 그렇지 않다. 빅테크는 종종 기독교적 가치에 적대적이며, 어떤 신기술은 분명 반(反)인간적이지만 다른 많은 기술은 모호하다.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거나 심지어 생산하는 행위의 윤리는 그 궁극적 목적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추측에 불과하다.
기술 비관주의자인 나는 실리콘밸리가 지닌 막강한 규모의 권력에 경악한다. 스마트폰을 갖고 있고 소셜 미디어도(마지못해) 사용하지만, 가능하면 신기술 사용을 피한다. 지난해 사순절에는 Spotify를 끊었고, 다시는 계정을 활성화하지 않았다. 대신 오래된 FM 라디오를 듣는다.
실제 사람이 선곡한 음악을 듣는 일에는 묘한 안정감이 있다. DJ가 내가 좋아하는 곡을 틀어 줄 때면 전능하신 분의 윙크처럼 느껴지곤 한다. 나의 Luddism(특정 기술을 포기하는 생활 방식) 성향은 에어컨마저 거부한다—현실을 조작하려는 파괴적 시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상처럼 느껴지는 아마존 프라임 대신 지역 상점에서 물건을 산다. 그리고 나는 빅테크의 ‘황금 송아지’인 ChatGPT를 혐오한다—심지어 학생들에게 교실에서 직접 손글씨로 에세이를 쓰게 할 정도다(학생들은 몹시 불평하지만).
그러나 ‘빅테크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나의 확신은 최근 클뤼니 연구소(Cluny Institute)가 주최한 한 콘퍼런스에서 도전을 받았다. 2024년에 설립된 클뤼니 연구소는 기업인이자 『원팅(Wanting)』의 저자인 루크 버지스(Luke Burgis)의 구상으로 탄생했다. 『원팅』은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이론’을 일반 대중에게 알리는 데 목적을 두었다. 연구소 이름은 “학습‧문화‧기술 발전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중세 수도원 ‘클뤼니’에서 따왔다.
버지스의 클뤼니 연구소는 “디지털 세계에서 그런 기관이 어떻게 재현될 수 있을지를 재구상”하고자 하며, “반(反)인간적 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 현대 기술과 제도”에 경계심을 품고 “영성의 우선성을 인식하는 새로운 창작자 세대”를 연결‧고취시키려 한다.
클뤼니 설립에 앞서, 가톨릭 신자인 버지스는 2023년 11월 ‘노비타테(Novitate) 콘퍼런스’를 조직했다. 이 행사는 지라르의 사상을 매개로 “아테네(이성), 예루살렘(신앙 전통), 실리콘밸리(비즈니스 등 혁신가)”라는 세 ‘은유적 도시’를 모으는 자리였다. 중요한 대화를 촉발했지만, 지라르의 제자 피터 틸이 기조연설자로 초청되었다는 이유로 비판도 받았다. 어떤 참석자는 틸의 ‘테크노-바이탈리즘’ 연설이 “적그리스도의 그림자에 지나치게 가까운” ‘묵시적’ 허무주의를 전파했다고 우려했다.
지난달 열린 ‘메타노이아(Metanoia) 콘퍼런스’는 규모가 작고 지라르의 유산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으나, 노비타테에서 제기된 주제를 발전시켜 “회심의 토대와 변화의 본질”을 탐구했다. 작가, 예술가, 기술 분야 기업인, 싱크탱크 리더, ‘북ish’ 전통주의자 등 다채로운 참가자들이 모여, 동방정교 신학자 마크 루시엔 신부, 소설가이자 클뤼니 부소장인 조던 카스트로, 시인 아리아나 라인스, 마셜 매클루언의 손자 앤드루 매클루언, 반(反)기술 활동가 어거스트 램, 세컨드 파운데이션 파트너스의 투자 책임자 벤 헌트 등과 함께 문학·예술·종교·기술을 아우르는 패널 토론을 진행했다.
버지스는 신기술과 그 배후의 실리콘밸리 거물들이 제기하는 도전 과제에 대해 순진하지 않으며, AI를 ‘신성화’하려는 의도도 없다. 실제로 여러 패널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성스러움의 개념을 제거하도록 설계된 기술에 대해 경고음을 울렸다. 그럼에도 콘퍼런스 전반의 분위기는 빅테크와 신앙 간 ‘대화’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버지스의 말을 빌리면 “분위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책만으로도 부족하다. 허무주의만으로도 부족하다. 내적 성찰만으로도 부족하다. 테크노-바이탈리즘도, 테크노-낙관주의도, ‘종교적 은둔’도, 이펙티브 알트루이즘도 모두 부족하다.” 기술을 진정한 ‘친(親)인간’적 목적으로 전환하려면, 도구의 내재성을 넘어서는 신앙에 의해 이끌리는 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테크노 비관주의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스마트폰을 아예 쓰지 않고 거리에서 낯선 이에게 길을 묻는 어거스트 램이 부러웠다. 또한 벤 헌트의 주장—“스크린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도록 ‘잘 만들어진, 견고한 대본’을 주입하여 자유의지를 약화시키고 ‘조종자들’(C. S. 루이스의 표현)이 누구인지에 대한 호기심을 앗아간다”—에도 크게 공감했다.
그러나 나를 가장 도전하게 한 것은 고급 케이터링 점심 뒤에 이어진 ‘특별 행사’였다. 휴대전화, 노트북, 스마트워치를 모두 내려놓고 30분간 침묵 명상을 하라는 시간이었다.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내면의 성소, 즉 그곳에 깃든 질문·충동·욕망과 마주하도록 제안받은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기술 혁신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성스러움에 대한 갈망’을 침묵시키기 위해 고안된 듯 보인다. 그러나 헌트는, 빅테크가 그 갈망을 약화시키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우리의 마음은 신을 향해 있다. 기술의 소음이 그 욕망을 흐리게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묻고, 찾고, 침묵 속에서 귀 기울이며, 새로운 기술을 공동선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그 ‘대화’를 주도하도록 부름받았거나 역량을 갖춘 것은 아닐지라도, 이번 콘퍼런스는 ‘기독교 신앙이 실리콘밸리를 누룩처럼 변혁할 가능성’을 일축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여전히 AI와 실리콘밸리가 준비 중인 그 무언가에 대해 낙관적이진 않지만, 빅테크의 어둠을 뚫고 나아가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교회'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