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톰슨이 노래한 하느님은 완고한 분이다. 그의 대표작 〈하늘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에서 한 영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달아난다.
“나는 그분에게서 달아났네, 밤을 지나 낮을 지나,
나는 그분에게서 달아났네, 세월의 아치 아래를 지나.”
그러나 “사냥개”는 끈질기다. “서두르지 않는 추적,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 신중한 속도, 위엄 넘치는 긴박함”으로 끝없이 뒤쫓는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세상 끝까지라도 찾아오시는, 이토록 열렬하고 단호한 사랑의 하느님은 누구신가?
그런 하느님이 웨스 앤더슨의 새 장편 영화 〈페니키아 계획(The Phoenician Scheme)〉 속에서 움직이신다. 영화는 J. 폴 게티나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를 연상케 하는 도덕 파탄의 거대 재벌, 아나톨 “자자” 코르다(베니치오 델 토로)를 따라간다. 또 한 차례 의문의 암살 시도를 가까스로 피한 그는 오랫동안 의절했던 딸 리즐(미아 스릴플턴)―수도복을 입은 새내기 수녀―을 불러들인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그녀에게 물려주는 한편, 생애 가장 중요한 사업인 “코르다 육·해상 페니키아 인프라 계획” 완수를 도와 달라고 요청한다.
많은 영화들이 ‘신의 그림자가 드리운’(God-haunted) 작품이라 불리곤 하지만, 〈페니키아 계획(The Phoenician Scheme)〉은 그 이상이다. 이 영화 속에서 하느님은 단지 암시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등장하며, 바로 빌 머레이가 그 역할을 맡는다. 영화 초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코르다는 잠시 천국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할머니를 만나지만 그녀는 변해 버린 손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암살자들의 습격이 반복될 때마다 그는 진입을 거부당하며 천국 문 앞에 선다. 매번 그는 부족한 존재로 판정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젊은 시절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고백한다. “주여, 정결과 절제를 제게 주소서. 다만 지금은 말고요.” 이 고백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영적으로는 왜곡된 태도이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과 떨어져 살며, 마지막 순간에야 그분을 피하려 애쓴다. “그분이 갑자기 오셔서, 너를 자는 중에 발견하지 않게 하라.” 코르다 역시 회개와 회심을 미룬 대가를 깨닫는다.
그러나 “하늘의 사냥개”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그는 리즐을 통해 드러난다. 버림받다시피 했음에도 그녀는 경건한 수녀가 되었다. 아버지의 사치와 허영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면서도, 그녀는 영적인 열매를 기대하며 그가 설정한 역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곧 코르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리즐은 아버지의 과거 잘못을 쉽게 용서하고, 코르다의 방치된 아홉 아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그의 사업에 인간미를 더하려 한다. 그녀는 아이들의 가정교사와 아버지의 새 보조인 비욘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한다.
코르다는 인프라 프로젝트를 지키기 위한 여정 속에서 점점 하느님께 가까워진다. 리즐의 영향과 모범, 과거와의 대면,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자기 이익이 결합되어, 그는 아홉 아들과 함께 가톨릭 세례를 받는다. 결정적인 이타적 행위로,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해 프로젝트 자금 부족을 메우고 계획을 구제한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흔히 “겉치레 미학”이라며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평을 듣는다. 주인공들은 대개 “부르주아의 부르주아적 고민”에 머물고, 화면은 “유별나고 귀여운(twee)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에르만노 올미처럼 느리고 묵상적인 리얼리즘으로 하류 계층의 물질적 현실을 포착했던 감독들과 달리, 앤더슨의 작품은 종종 지나치게 양식화되고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인 해석일 뿐이다. 앤더슨에게 ‘아름다움’은 곧 ‘현실’이다. 키츠의 시구를 빌리자면, “아름다움은 진리요, 진리는 아름다움”이며, 우리는 아름다움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리즐이 아버지의 사치 세계를 벗어나 수녀 서약을 하려 할 때, 그녀의 수녀원 원장은 이를 만류한다. 코르다가 선물한 보석 파이프와 다이아몬드 묵주 등에 애착을 느끼는 모습은 수도 소명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원장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고 꾸짖지 는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화려함과 웅장함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기도 한다며, 모든 이가 가난 속에 부름 받은 것은 아니라고 위로한다.
뉴욕 시사회 질의응답에서 웨스 앤더슨은 오늘날 거대 재벌들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짧게 언급했다. 예술가에게도 비슷한 잠재력이 있다. 톰슨의 시에서 “사냥개”는 이렇게 말한다.
“무(無)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이는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나 예술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하느님께 바쳐질 때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유 중 하나는, 세상과 달리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온전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코르다에게 끊임없이 기회의 밧줄이 던져지지만,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방식으로만 붙잡을 수 있다.
코르다처럼 죽음의 문턱에 닿아야만 방향을 바꾸고 하느님의 추격을 끝내려 해선 안 된다. 우리에게는 매 순간이 회심의 기회이다. 프랜시스 톰슨의 하느님, 웨스 앤더슨의 하느님이 신기하고 경이로운 점은, 그분은 실재하며, 늘 우리를 찾고 계신다는 것이다.
★ 정의롭고 의연했던 故 조의제 바오로 형제님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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