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말, 트럼프 행정부의 최고위 관계자들은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하여 보여주는 이해할 수 없는 고집에 좌절하며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고 밝혔다. 이후 미국은 몇 달간 우크라이나에 군사 지원을 중단한 채, 전쟁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하도록 둘 수 있다는 암시를 내비쳤다. 당시의 표어는 “이건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였다.
이에 반대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는 말은 맞다. 그것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단순한 거래의 문제로만 여겨지는 사람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우크라이나의 존재 자체를 건 생존의 전쟁이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정 지역의 영토를 두고 벌어지는 전쟁도 아니고,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자들의 언어 권리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도 아니며, 희귀 금속을 둘러싼 다툼도 아니다.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쟁이다. 그 자체로 완결된 이유다.
푸틴은 처음부터 이를 분명히 해왔다. 그는 우크라이나를 가짜 국가라 보고, “나치”들이 지배하는 비정상적인 정권이라고 간주하며, 전쟁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파괴하고 남은 잔해를 “러시아 세계”에 통합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푸틴은 거짓말쟁이이고, 도둑이며, 살인자지만 이 점에서는 아주 투명했다. 로마의 노(老) 정치가 카토가 카르타고에 대해 외쳤던 “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Carthago delenda est)”를 차용하자면, 푸틴은 "우크라이나는 멸망해야 한다(Ukraina delenda est)"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치명적 집착이야말로, 우리가 이 전쟁에 연루된 핵심 이유다.
푸틴의 왜곡된 역사 해석과 달리, 소련은 “러시아 세계”의 확대판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허구의 구성체였고, 다양한 민족국가들이 “공화국”이라는 이름 아래 테러와 폭력으로 결속된 인위적인 연합체였다. 소련의 해체는 그 안에 갇혀 있던 민족국가들이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바탕으로 독립 국가로서의 미래를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이 해방은 서방 세계가 냉전 동안 끝까지 흔들림 없이 버틴 덕분이었다. 그 결연한 의지의 정치적·군사적 표현이 바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였고, 그 핵심 리더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자유 유럽을 지키기 위해 목숨과 재정을 기꺼이 투자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었고, 미국의 국가 이익에도 부합했기 때문이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냉전의 승리를 되돌리려는 전쟁이다. 만약 푸틴이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는 결코 거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발트 3국은 이미 이를 알고 있다. 폴란드도 알고 있다. 스웨덴과 핀란드가 NATO에 가입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미국 행정부 고위 관료들 중 일부는 이것을 별일 아닌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러시아, 중국, 미국이 각각 자기 세력권을 나눠 가지는 3극 세계가 오히려 미국에게는 더 나은 질서라고 여길 수도 있다. 미국이 부를 추구하는 데 방해받지 않는 세계 말이다.
천만에!
현대 정치사 어디에도, 패권을 꿈꾸는 독재 권력이 스스로 멈춘 예는 없다. 나폴레옹의 프랑스도, 빌헬름 시대의 독일도, 제3제국도, 일본 제국도 그랬다. 소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덩샤오핑 시기에 잠시 숨을 고르며 경제력을 키웠고, 이제 그 힘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강화하여 과거의 “굴욕의 세기”를 되돌리려 세계 전역에서 힘을 과시하고 있다. 러시아가 유럽을 지배하고, 중국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하는 3극 체제는 미국에게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재앙’이다.
여기에는 도덕적인 문제도 있다. ‘정의 없는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교황 레오 14세는 첫 발언들 중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 푸틴의 야만이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는다면, 이미 취약한 국제 정치의 도덕적 생태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만약 다른 침략자들이 민간인을 향해 수백 차례 드론과 미사일을 퍼부어도 아무런 처벌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면, 그들은 반드시 미래에도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무고한 이들이 피해자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기도 하다. 만약 푸틴이 승리한다면, 미국의 정보 공간에서 가장 기만적인 목소리들—예를 들어 터커 칼슨 같은 인물들—이 자신들의 입장이 옳았다고 여기게 될 것이고, 그들의 허위 정보 캠페인은 민주주의의 생명줄인 ‘이성적 토론’을 더욱 침식시킬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우리가 대신 싸워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싸울 수 있는 도구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 도구를 제공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고, 전략적으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모두가 함께 싸우고 있는 미래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