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콘스탄틴 대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의 17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회의는 아리우스 논쟁을 해결하고자 열린 것으로, 그 결과 작성된 신조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 되었다. 이번 주일은 ‘삼위일체 주일’이기도 하다. 이 시점은 ‘하느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라는 교회의 독특한 고백의 의미를 되새기기에 매우 적절한 때이다.
이 고백의 한 측면을 이해하려면, 신조의 마지막 부분에서 출발할 수 있다. 종말론에 대한 세부적인 견해는 다를지라도, 모든 기독교인은 역사의 정점이 ‘죽은 자의 부활과 다가올 세상의 삶’에 있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세상이 단순히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우리는 ‘같은 것의 반복’이라는 암울한 기대를 부정하며, ‘죽음의 최종성을 거부’ 한다.
세상의 끝은 불이나 얼음이나 시체로 뒤덮인 무대가 아니라, 끝없는 혼인 잔치에서의 웃음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기독교는 종말을 믿는 신앙일 뿐 아니라, ‘종말이 곧 영화로운 시작’임을 믿는 희극적 신앙이다. 새 예루살렘은 에덴의 회복이지만, 그것은 ‘도시화된 에덴’, 즉 ‘도시 정원의 모습’을 띤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성경은 그 전체의 흐름에서나 세부 사항에서나, ‘신성한 희극(divine comedy)’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마지막 아담은 첫 아담을 능가한다.(로마서 5:12–21; 고린도전서 15장)’ 성소는 광야의 이동식 천막에서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그리고 마침내 인간 이성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궁극적 도시-성전으로 발전해간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옛사람들처럼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나빠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를 본받아 최고의 포도주를 마지막에 내놓으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함을 보여주는 구현된 비유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은 성경이 말하는 세계사의 근본적인 반전 포인트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삼위일체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고대 철학자들은 대체로 ‘존재의 최고 원리’, 즉 만물의 근원이 반드시 순수하고 분열되지 않은 ‘하나’(One)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절대자’란 정의상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만일 어떤 다른 것과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절대자’가 아닌 ‘상대자’가 된다. ‘하나’는 동반자도 경쟁자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첫 원리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것은 반드시 감소와 쇠퇴의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비극적 형이상학’에 따라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삼위일체 신학은 이러한 통념을 뒤집었다. 삼위 하느님은 ‘하나’이시지만, ‘전례 없는 방식’으로 하나이시다. 니케아 신조는 ‘관계적 절대자(Relational Absolute)’를 고백한다. 즉, 아버지는 영원히 아들과 성령과의 관계 안에서 아버지이시며, 아들과 성령 또한 그와 관계를 맺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오지만, 그 신성이 줄어들거나 분열되지 않는다. 아리우스주의와 달리,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과정에는 ‘신성의 누수(leakage)’가 없다. 제2위격은 제1위격의 형상으로서 그 존재의 전부를 담고 있으며, 오직 ‘둘째’라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더 나아가 아타나시우스가 강조했듯, 아버지가 참으로 아버지일 수 있는 것은 아들을 낳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다면 아버지도 없다. 아들이 영원하지 않다면, 영원한 아버지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이름 없는 “비생성된 존재”일 뿐이다.
니케아는 ‘존재론의 혁명’을 의미한다. 하나의 내적 운동 안에서의 방사(emanation)와 생성(generation), 즉 신으로부터 신이시며, 아들을 낳음으로써 참으로 아버지이신 아버지. 삼위일체는 형이상학적 희극이다. 왜냐하면 둘째와 셋째는 첫째의 ‘말씀과 영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은 중간과 끝과 연결된다. 고대 이교 형이상학과 신화는 모두 동일한 비극적 구조를 보여준다. 세상이 하나로부터 떨어져 나온 타락의 결과이듯, 인류 역시 황금시대에서 은시대, 청동시대를 지나 완전히 쇠락한다. 하지만 그 근원이 삼위일체이시라면, 제2위격이 제1위격의 영광이라면, 시간의 두 번째 순간은 첫 번째를 보완하고, 세 번째는 두 번째를, 네 번째는 세 번째를 보완하면서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는 개념이 가능하다.
바실리우스 대제(Basil the Great)는 이러한 논리를 간파했다. 고대적 사고를 따르던 그의 아리우스주의 반대자들은 "둘째 인격은 첫째 인격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바실리우스는 『성령에 대하여』(47장)에서 반론을 제기한다.
“둘째는 항상 첫째에 종속되며, 종속된 것은 항상 그보다 열등하다면, 당신들 말대로라면, 영적인 것은 육적인 것보다 열등하고, 하늘로부터 온 사람은 흙에서 난 사람보다 못하다는 말이오!”
아리우스주의는 결국 아리우스적(비극적) 역사 이해, 즉 ‘이교적 역사관’을 내포한다. 만일 둘째 인격이 열등하다면, 둘째 아담도 첫째 아담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반대로, 두 아담의 희극적 역사는 곧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의 희극적 생명’을 펼쳐 보인다.
우리는 삼위일체 창조주를 고백한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으며, ‘새 예루살렘의 강림’을 소망한다. 그렇다면 이 기독교 신앙의 두 가지 고유한 특성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까?
기독교가 ‘희극적’인 것은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일까?
그렇다. 두 번 말해도 ‘YES’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