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영국 누아르 영화 ‘피해자(Victim)’의 한 장면에서 네 명의 동성애 남성이 사적 도덕성과 공적 규범에 대해 이야기한다. 네 사람 모두 협박 조직에 의해 갈취를 당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변호사 멜빌 “Mel” Farr(멜빌 파 역의 더크 보가드)는 경찰에 신고하자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돈을 내고 무마하고자 한다.
논쟁은 그들을 모두 숨게 만드는 ‘sodomy law(동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법)’으로 옮아간다. “나는 사랑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사랑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왜 법 밖에서 살아야 합니까?”라며 한 사람이 토로한다. 파는 그가 유명 배우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사람들은 “유행을 만든다.” 그의 성적 지향이 드러나 “젊은이들”이 그가 생활하는 방식을 알게 되면, 그것이 “따라야 할 본보기”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새로운 공적 규범이 되지는 않을까?
곧이어 다른 동료가 끼어들어, “물론 모두가 ‘청소년 보호’에 동의한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동의한 성인 남성이 사적으로 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낡은 법으로 처벌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실제로 파의 영웅적 서사는 자신의 경력을 걸고 그 법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울펜든 보고서’(Wolfenden Report)가 10년 넘게 논의되던 와중에 공개된 ‘빅팀’은 예술이 삶을 바꾸기를 노골적으로 의도한 작품이었다. 미국영화협회(MPAA)의 심의 마크(영화 최초로 “homosexual”이란 단어를 사용)를 받지 못할 만큼 과격했지만, 교훈적 각본 덕분에 영국 여론은 실제로 움직였다. 1967년,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동성 성인 간 합의된 성행위가 합법화됐다.
2025년 오늘,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고풍스럽게 보인다. Farr가 ‘악마의 대변인’ 역할로 예견한 대로 공적 규범은 완전히 뒤집혔고, 심지어 사회의 이른바 “보수” 소수파 가운데 일부조차 바람에 몸을 맡길 태세다. 최근 글렌 그린왈드의 페티시 성관계 영상이 유출된 후의 반응에서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린왈드의 공식 X(전 트위터) 계정이 잠시 그 영상을 리트윗했다(현재 삭제됨). 그린왈드는 영상이 자신의 “지식이나 동의 없이” 온라인에 게시되었고, “악의적인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누가 유출 배후인지 추측이 난무했으며, 반(反)이스라엘 음모론까지 제기됐다. 이는 2013년 뉴욕 데일리 뉴스가 그의 “성인 영상 관련 사업”을 특종 보도하기 직전, 그가 “국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고 음산하게 암시했던 전례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저널리스트 영웅 서사에서 악당이 누구든, 피해자는 늘 글렌 그린왈드가 아니다.
그린왈드가 낸 첫 성명은 굴욕적인 영상에 대해 “창피함이나 후회”가 전혀 없다고 시인했다. 이는 “사생활에서 합의한 성인이 나눈 친밀한 행위”라고 했다(세부 내용은 독자를 위해 생략한다). 그는 또한 문제의 장면이 자신의 집에서 촬영된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만약 촬영 장소가 자택이라면, 그와 배우자가 입양한 두 자녀 때문에 법적 문제 소지가 될 수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자녀만으로도 충분히 “창피함이나 후회”를 느껴야 한다. 그들은 그린왈드뿐 아니라, 그의 동성 “결혼”과 가족 구성을 정상화한 이 사회 전체를 조용히 고발하고 있다. 그 정상화는 ‘동성애적 사랑도 남녀 간 사랑만큼 자연스럽다’는 신화와 ‘동성애자들은 그저 조용히 사생활을 누릴 권리만 요구한다’는 신화 위에 세워졌다. 이제 그린왈드는 “가족” 흉내를 승인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성생활은 방탕한 자유주의자처럼 즐긴다. 애초에 그것이 전부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최근 무너진 성적 규범을 개탄하던 인사들까지 그린왈드를 옹호하고 나섰다. 케이티 파우스트는 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X 스레드로 정리했는데, 거기엔 메건 켈리, 캔디스 오언스, 찰리 커크 같은 ‘보수 산업(Conservatism, Inc.)’의 거물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논바이너리’ 샘 브린턴이 수하물을 훔쳤을 때, 켈리는 바이든의 ‘다양성 채용’이라며 조롱했다. 그러나 그린왈드 관련 스캔들은 “무의미한 잡음”일 뿐이다. 오언스는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는 동성애 남성들이 “아, 나는 게이라서”라는 변명을 도피처로 삼는다고 장황하게 설파한 바 있다. 그러나 그린왈드는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하고 정직한 목소리”다. 커크는 동성애 민주당 보좌관의 유출된 성관계 영상을 조롱하며 1월 6일 시위대의 처벌과 대비했지만, 그린왈드의 유출은 “정치적 동기가 있는 범죄이자 역겨운 행위”라고 규정했다.
Conservatism, Inc.는 대리모를 통해 쌍둥이를 얻은 데이브 루빈과 그의 동성 배우자를 축하하기 위해 달려가기도 했다. 루빈은 이를 두고 “보수파가 동성애자들을 미워한다는 건 착각”이라며 청중을 안심시켰다.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실에서는 쌍둥이를 위한 배냇저고리 세트까지 보내줬다. 이런 노골적인 ‘인정’ 제스처가 있어야만, 루빈은 보수파에 ‘증오 없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재평가에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그린왈드 스캔들은 진정한 성적 보수주의가 Conservatism, Inc.의 정치적 눈속임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방탕함을 비호하려고 진영 논리에 매달려선 안 된다. 그린왈드는 비판 과정에서 자신을 공격한 이가 도널드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사실을 들먹이며, 트럼프의 노골적 방탕함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의 위선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 보수주의자라면 그가 건네는 뻔뻔한 ‘일관성’의 초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린왈드의 행태는 일탈이며 낙인이 필요하지만, 일론 머스크가 가능한 한 많은 여성에게서 최대한 많은 자녀를 얻겠다는 파렴치한 행보도 마찬가지로 비판받아야 한다. 특히 아이들이 관련된 사안에서 “저쪽 일탈”과 “우리 쪽 일탈”을 구분해선 안 된다.
한때 보수주의자들은 성적 일탈이 협박꾼의 먹잇감이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합리적 주장을 펼쳤다. 그 시절엔 진보 운동가들조차 우리가 지금처럼 파멸적인 부패(특히 ‘청소년’ 타락)로 이렇게 급속히 추락할 줄 상상하지 못했다. 여전히 “정부는 침실에 개입하지 말라”는 주장은 유효하지만, 1961년에서 2025년으로 요동치는 추의 한복판에서, 사회가 ‘정의’라는 지점에 멈추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쳐 버렸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졌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