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28] 월터 브루그만을 기억하며
  • 마이클 C. 레가스피 Michael C. Legaspi is associate professor of Old Testament at St. Vladimir’s Orthodox Theological Seminary in Yonkers, NY. 뉴욕주 신학대학원 조교수

  • 이번 달 초, 구약성서의 거장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1933–2025)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국 주류 개신교 학계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으며, 시편과 예언서에 대한 풍부한 해석자로, 또한 신학계에서 '성서신학(biblical theology)'이라 불리는 분야의 강력한 대변자였다.

    성서신학이란 성경 자체의 주제와 범주에 기초하여 신앙을 설명하는 접근 방식이다. 브루그만의 성서신학은 솔직히 내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종종 역사적, 존재론적 질문들을 배제한 채 포스트모던 사조에 경솔하게 굴복했고, 이로 인해 구약 본문은 신학적 바탕 없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곤 했다. 전통의 지혜나 하느님에 대한 다양한 성서적 묘사를 통합하려는 시도 없이, 그는 신학적 자의성과 모순의 위험을 감수했다.

    브레바드 차일즈(Brevard Childs)는 브루그만이 전통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영지주의적 경향으로 빠진다고 보았고, 존 레벤슨(Jon Levenson)은 그의 대표작 『구약신학: 증언, 논쟁, 변론』(1997) 이 유대-기독교 관계의 핵심 문제를 오해했으며, 낡은 자유주의 신학을 포스트모던 언어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나 역시 성서신학에서는 차일즈와 레벤슨의 입장에 더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그만의 죽음은 그를 기리는 의미 있는 계기이며, 그의 유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들을 성찰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던 브루그만은 동시에 교회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대학이나 신학대학원이 아니라 에덴신학교(모교)에서 1961년부터 1986년까지, 이어 콜럼비아신학교에서 1986년부터 2003년 은퇴까지 재직했다. 그는 늘 교회 공동체의 삶에 밀접하게 관여했고, 교회가 직면한 설교와 사회적 실천의 과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브루그만은 학술적 형식과 언어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업은 교회가 ‘해석 공동체’로서 이 세상 안에 있으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는 긴장 속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예언자의 상상력(The Prophetic Imagination)』(1978) 에서 그는, 예언자들이 언어를 통해 기존 권력구조를 비판하고, 탐욕과 불의,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적 의식(alternative consciousness)’을 양성했다고 주장했다.

    이 용어는 다소 시대에 뒤처진 느낌을 주지만, 그는 ‘의식’의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이렇게 통찰할 수 있었던 것은, '대안적 의식'이야말로 교회 생활의 본질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이웃을 인식하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가는 곳이다. 이 점에서 ‘교회인’ 브루그만은 신자들이 성서의 뿌리로 되돌아가도록 도왔다. 바로 이것이 해석의 중심 과제다. 브루그만의 삶과 작업은 성서학이 이 과제를 도울 수 있지만, 그것이 생명력을 가지려면 교회의 삶에 참여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는 1980~90년대에 학문적 지형이 급격히 바뀌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교회를 존중했다. 다른 학자들이 기존의 역사비평 방법론에 안주할 때, 브루그만은 포스트모던의 거센 흐름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는 1993년 저서 『협상의 대상이 된 본문(Texts Under Negotiation)』 에서 거대서사와 문화적 헤게모니, 인식론적 근본주의의 붕괴를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포스트모던 시대야말로 “기독교 사역에 거대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에는 성서학자는 역사와 어문학을 다루고, 신학은 신학자에게 맡겼지만, 브루그만은 이러한 구획을 넘어서서 ‘성서를 가지고 신학을 하는’ 성서신학을 새롭게 상상했다. 그는 신학적 관심을 가진 성서학자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영역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역사학자들이 진정한 객관성을 가질 수 없다면, 왜 성서학자들은 신앙고백적 태도와 종교적 편향을 숨겨야 하는가?

    그렇다고 해서 브루그만이 단순한 기회주의자거나 유행을 쫓는 인물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포착하고 용기 있게 그 길을 열어간 선각자였다. 이러한 통찰과 실천 덕분에 오늘날 성서신학이 활기를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성서학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성공적으로 항해하면서도, 성서신학을 교회의 삶과 다시 연결하려는 사명을 수행한 소수의 탁월한 학자 중 한사람이었다. 이러한 이중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브루그만이 자주 사용하던 두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는 본문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학문적 ‘상상력(imagination)’과, 학문을 넘어서는 어떤 더 큰 것을 향한 ‘헌신(commitment)’을 함께 지닌 인물이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6-17 20:31]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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