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미국 국무부 차관보 윌리엄 R. 캐슬 주니어는 “이 나라에서 단연 가장 중요한 로마 가톨릭 인물”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명백히 큰 힘과 권위를 지닌 인물”로서 “자기 확신이 매우 강하다”고 했다. 그의 후임자인 서머 웰스는 그에 대해 “희귀하고 뛰어난 자질 외에도, 탁월한 시야를 가진 정치가였다”고 평가했다.
『뉴 리퍼블릭』 창간인이자 60년간 세계적 저널리스트였던 월터 립먼은 그를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라고 회고했다. 캐슬은 자신의 일기에 “그를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너무나 능수능란하고 설득력이 있어 내가 원하지 않는 약속을 하게 만들 것 같았다”고 썼다. 이 모든 평가는 허버트 후버 행정부 시절 미국 외교 수장 다음가는 인물이 남긴 것이다.
그들이 말한 이 인물은 정치인도, 주교도, 산업계 거물도 아니었다. 그는 돈이 없었고 학계 경력도 없었으며, 본인도 인정한 바 있듯이 내성적인 성격에 고독을 사랑했다. 건강이 늘 좋지 않아 의사의 권고로 긴 휴식을 반복했다. 맨해튼에서 아일랜드계 노동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공립·교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공적 삶 내내 고향 뉴욕으로 돌아가 『Catholic World』 잡지를 편집하며, 결혼하지 않은 자신과 깊고 투명하게 순결한 우정을 나눈 독실한 가톨릭 여성들—그의 '영적 가족'—곁에 있고 싶어했다.
그는 쿨리지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력자이자 측근이 된 자리에서 여러 번 물러나려 했으나, 그를 고용한 주교들은 그의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글라스 슬로슨은 이렇게 적었다. “주교들은 그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출근하고 필요한 만큼 휴가를 가도 좋다고 했다. 그저 그의 판단을 원했을 뿐이다.”
바울회 사제 존 J. 버크는 1921년 비공식적 수장인 제임스 기번스 추기경 사망 이후부터 1936년 자신의 죽음까지, 미국에서 “단연 가장 중요한 로마 가톨릭 인물”이었다. 그는 국가가톨릭복지회의(NCWC) 초대 총무(사무총장 격)로서 오늘날 미국주교회의(USCCB)의 선조격 조직을 이끌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에게 “교회에 대한 탁월한 봉사”에 주어지는 극히 드문 신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그는 수도회 소속 미국 사제로서는 최초로 교황에게서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리 국민의 삶에서 위대한 영적 힘이 사라졌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슬로슨은 샌디에이고 국립대 역사학 명예교수로서, 존 버크에 관한 인쇄된 유일한 전기이자 유일한 학술 전기를 집필했다. 수십 년간의 자료 조사와 방대한 아카이브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학술적 허세 없이 명료한 문체로 쓰였으며, 지난 세기 미국 가톨릭의 공적 이미지를 형성한 인물에 대한 결정적 연구다. 20세기 미국 역사, 가톨릭 이슈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 공적 가톨릭의 조율자
슬로슨은 이미 버크가 활동하던 시대를 다룬 두 권의 저서를 집필한 바 있다. 하나는 『국가가톨릭복지회의 설립과 첫 10년』이며, 다른 하나는 『교육부 전쟁, 1918\~1932: 공립학교, 가톨릭학교, 그리고 사회질서』이다. 또한 그는 보스턴의 가톨릭 권력자이자 버크의 숙적이었던 윌리엄 오코넬 추기경의 전기도 집필했다. 이 세 권의 책에서 버크는 주연급 조연이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슬로슨은 그를 중심에 세운다. 1차, 2차 세계대전 사이 교회의 공적 삶의 조종석에 있었던 인물로서 말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