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가톨릭교회는 교황청과는 간헐적으로만 연결된 각 교구의 집합체에 불과했다. 미국 주교단은 1884년 이후 한 몸으로 회의를 연 적이 없었고, 전국적 발언력도 정체성도 없었다. 그러나 1917년 봄, 미국은 수백만 병사를 필요로 했고 그중 약 25%는 가톨릭 신자였다. 윌슨 행정부는 결국 미국 주교들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당시 『Catholic World』 편집장이던 버크는 파리 추기경 및 기번스 추기경과의 인맥을 활용해 군목 지원협회를 창설했다.
그는 전국 각 교구와 가톨릭 단체들에 편지를 보내, 병사들을 위한 휴게실과 경당, 군종 사제를 파견하는 방안을 조율하자고 제안했다. 슬로슨에 따르면, 버크는 이미 1905년에 “통합되고 조직화된 가톨릭 행동”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출판 외에는 경험이 없던 내성적인 42세 편집자”였지만, 1917년 그는 미국 가톨릭 전체를 전쟁 지원으로 동원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조직화는 '국가가톨릭전시회의(NCWC)'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이는 버크의 영향 아래 점차 발전하여 ‘국가가톨릭복지회의’로 진화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미국이 전후 재건에서 중심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보았고, 교회가 그 중심이 되기를 바랐다. 바티칸 특사 체레티 대주교는 “이제 로마는 가톨릭의 모든 면에서 미국을 선도자로 보고 있다”고 선언했다. 주교들은 점점 더, 버크는 명확히, 연방 정부와 교회의 이해가 점점 밀접하게 얽힐 것임을 인식했다. 그는 “워싱턴 권력의 맥박을 느낄 수 있어야 가톨릭 복지를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책의 본론은 바로 슬로슨이 이끄는 버크의 “세계와 활동”에 대한 안내이다. 책은 연대기적으로 전개되며, 국제 문제(주로 멕시코와 아이티 등 가톨릭 국가 관련)를 다룬 부분과 국내 이슈를 오가며 서술된다. 국내 이슈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산아 제한 문제였다.
1923년 마거릿 생어(Margaret Sanger)와 메리 웨어 데넷(Mary Ware Dennett)이 연방 차원의 입법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산아 제한은 정치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버크는 이렇게 한탄했다.
“사실상 우리는 산아 제한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가톨릭 교회만 홀로 남겨졌다.”
“개신교 교회나 개신교 단체들은 전체로서 우리와 연합하지 않는다. 이 문제가 국민 생활 전반의 도덕성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로, 국민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기보다는 단순히 가톨릭 교리 문제로만 간주될 위험이 크다.”
이러한 경고는 이후 피임, 이혼, 낙태, 동성결혼 문제와 관련된 문화적·법적 논쟁에서 진보적 담론의 단골 구절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인디애나 등에서 제기된 ‘정교분리 조항’ 관련 소송에서, 낙태 옹호 측은 낙태 제한법이 생명의 시작 시점에 대한 신학적 관점에 기반한 것이라 주장한다.)
버크가 반복적으로 고뇌한 또 다른 문제는 영화 산업의 음란성 문제였다. 당시 영화는 급속히 확산되던 새로운 매체였고, 도발적 실험이 이어지고 있었다. 버크를 완전히 질리게 만든 결정타는 한 무성 영화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글로리아 스완슨이 입은 잠옷이 너무 얇아 관객이 그녀의 속살까지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 외에도 버크는 금주법으로 인해 성찬용 포도주의 확보가 어려워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 주류 당국과 협상했고, 아동 노동을 금지하는 헌법 개정안에 대해선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보스턴 추기경 오코넬이 해당 조항에 대한 NCWC의 지지 입장을 막으려 하자, 버크는 “오코넬은 극지방 탐험만큼이나 아동 복지에 무관심하다”고 비꼬았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