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33] 미국 가톨릭을 창조하다. ③
  • 제라드 V. 브래들리 Gerard V. Bradley is professor of law emeritus at the University of Notre Dame. (노트르담 대학교 명예 법학 교수)

  • ▣ 미국 내 가장 중요한 과제: 가톨릭 학교

    무엇보다 버크에게 국내 과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톨릭 학교였다. 1920년대 부활한 反가톨릭 정서는 KKK(백인우월주의 단체)와 프리메이슨의 정치적 활동 증가와 함께 다시 불붙었고, 이는 가톨릭 학교의 존재 자체, 독립성, 그리고 재정적 생존을 위협했다. 주 정부의 강제 통합 정책과 연방 관료의 교육 통제 시도는 교회 학교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했다.

    대공황으로 인한 공적 자금 부족은 가톨릭 학교 운영에 큰 타격을 줬다. 주교단 -실제로는 버크-은오리건주에서 공립학교 강제 등록법을 대상으로 한 소송을 주도했고, 1925년 미국 대법원은 피어스 대 소사이어티 오브 시스터스(Pierce v. Society of Sisters) 판결을 통해 교회 학교의 권리를 인정했다. 이 판결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부모의 교육권’ 판례의 출발점이 되었다.

    ▣ 버크의 국제 외교와 멕시코

    하지만 버크의 가장 큰 집착은 멕시코 문제였다. 슬로슨은 “멕시코 내 교회-국가 갈등을 종식시키는 일이 그의 인생 마지막 10년을 지배했다”고 쓴다. 1917년 이후 멕시코는 강경한 反교회 정부가 잇따라 집권했으며, 1925년부터는 교황청의 요청에 따라 NCWC가 미국 정부의 개입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9년, 버크가 주도한 복잡한 협상을 통해 일종의 타협안이 마련됐지만, 멕시코 당국은 이를 여러 차례 위반했고, 이에 바티칸과 버크는 강하게 반발했다.

    버크는 이 10년 간의 외교 위기 속에서 미국 주교단의 공식 대변인이었고, 사실상 바티칸의 외교대표로도 활동했다. 미국 정부의 비공식 특사로서 후버와 루스벨트 정권의 국무부는 버크를 통해 외교적 제안을 공식화했다. 멕시코 대통령들은 그를 가장 진지하게 대우했다.

    한 임시 대통령은 미국 국무부 차관보에게 “전임자와의 협상을 계속하겠지만, 그 상대는 오직 버크이지 멕시코 주교들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버크는 망명 중이던 멕시코 주교들의 기대와 반응까지 능수능란하게 관리했다. 이처럼 다섯 이해 당사자 모두가 그에게 비상한 신뢰를 보냈다는 점은, 그가 지닌 비범한 자질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버크는 “매일 멕시코 문제에 직면하며, 나로서는 상상도 못한 문제들이었다. 나는 이런 일을 감당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느낀다”고 그의 ‘영적 가족’에게 털어놓았다. 반면 캐슬 차관보는 그에 대해 “겉으론 유연하되, 속은 강철로 된 인물이다. 2~3세기 전 교회의 정치 사안을 좌지우지하던 위대한 성직자의 전형”이라고 평했다. 놀랍게도, 버크는 이 모든 외교적 책임을 수행하면서도 거짓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슬로슨은 그가 거짓을 말한 유일한 사례가 NCWC 동료의 사소한 실수를 은폐하기 위한 일회성 거짓말이었고, 그것도 파일에 메모로 자백했다고 밝힌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6-23 07:18]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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