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가톨릭 정체성 형성의 네 가지 통찰
NCWC에서 버크가 수행한 역할은 적어도 다음 네 가지 통찰과 원칙을 포함한다. 이 네 가지는 미국 가톨릭의 초기 형성과 그 정체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이후 교회와 국가 모두가 이 교훈을 잊거나 희석할 때마다 부작용이 따랐다.
첫째, 버크는 20세기 초 미국 가톨릭 정체성을 정의하는 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바울회 소속 사제였다. 바울회는 개종자인 아이작 헤커(Isaac Hecker)가 1858년에 창립한 수도회로, 유럽 가톨릭은 이미 퇴락했으며 가톨릭 신앙과 미국 건국의 원리 사이에는 깊은 조화가 있다고 믿었다. 버크의 영성은 철저히 바울회적이었으며, 로마 중심주의(ultramontanism)와는 거리가 멀었다. 슬로슨에 따르면 버크는 교황청의 사회 교서들을 그다지 자주 인용하지도 않았다. 그는 바티칸과 긴밀히 협력했지만, 자주 교황 문헌을 언급하진 않았다.
버크가 형성한 미국 교회는 독특한 구조였다. 그것은 보수주의자들(예: 오코넬 추기경)이 원하는 것처럼 ‘로마적’이지도 않았고, 민족 집단들이 원하는 것처럼 분열되지도 않았으며, 자유주의자들이 선호하는 ‘Gallican (교황권 제한)’도 아니었다. 또한 미국의 非가톨릭 다수파들이 바랐던 것처럼 국가에 종속된 ‘Erastian (국가의 교회 통제)’ 모델도 아니었다. 슬로슨은 이렇게 평가한다. 버크는 “교회에 대한 사랑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조화롭게 융합시켰고, 그것을 NCWC라는 조직 안에 구현하고 상징했다.”
버크는 또한 교육의 목적이 ‘국가정신’이나 ‘국민정신’에 부합하는 시민을 만드는 것이라는 전제를 반박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교육은 그 자체로 교육이어야 한다. 우리 민주주의는 국민의 손에 국가의 운명과 통치, 그리고 영혼을 맡길 수 있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즉, 미국의 전통적인 신념은 공화주의적 정부는-“민주주의”가 아니라-교회들에 의해 주입된 신념과 습관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종교는 기반, 즉 아래로부터의 인프라이며, 정치 질서는 국민이 신성한 실재에 대해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미국 건국자들과 이후 세대에게 “시민종교”(civil religion)는 익숙한 개념이 아니었고, 오히려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었다.
우리는 이 잡지(First Things)의 창립자가 말한 “벌거벗은 공적 광장(the naked public square)” 속에서 60년 넘게 살았다. 하지만 21세기 초, 법원이 다시 신성한 것을 공적 공간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대법원은 여전히 버크가 오래전에 간파했던 “미국 전통의 급진적 전도(顚倒)”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다.
둘째, 버크는 “공동” 또는 “통일된” 가톨릭 행동은 주교의 지도 아래에서만 가능하다고 자주 강조했지만, 그는 성직주의자(clericalist)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존 코트니 머레이 이전까지 그 누구보다도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강력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명확히 표현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함으로의 부르심(perfection)을 모든 사람에게—성직자나 수도자뿐 아니라 예외 없이—주셨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우리는 사실상 그 반대의 설교를 해왔다. (…) 우리는 가톨릭 문제의 결정과 방향 설정은 성직자의 몫이라는 가정을 해왔다. 그리고 평신도들은 그 가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평신도가 가정, 사회, 정치, 산업, 문학적 삶에 대한 가톨릭 진리를 책임 있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될 경우 교회와 미국 모두가 더 나아질 것이라 보았다. 특히 구대륙의 ‘가톨릭 국가’-예컨대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더욱 그렇다고 믿었다.
이는 평신도 여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사회 복지는 시대적 과제였으며, 그것은 진리와 정의라는 가톨릭 교회의 두 기둥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회복지는 본질적으로 평신도의 영역이며, 여성 가톨릭 사회복지사들은 신앙과 전문성 양면에서 훈련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버크는 국가가톨릭사회복지학교(National Catholic School of Social Service)를 설립했고, 이 학교는 그의 비공식적 본당 역할을 하게 되었다.
셋째, 버크는 당대 그 어떤 성직자보다도 정계 및 외교 무대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정치 협상과 외교 활동에 늘 깊이 관여한 그는, 사실상 하나의 로비 단체를 이끌었던 최고의 전략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력자나 부자에 아부하지 않았고, 정치 거래에 연루되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솔직했고, 권력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공적 인물로서 모범이었고, 더 중요하게는 교회의 독립성과 진리 선포자로서의 신뢰성을 지키는 엄격한 수호자였다.
그는 NCWC가 “비정파적(non-political)”이어야 하고, “진실을 말하는 데 있어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공익 활동 영역에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권리가 없으며, 오직 “도덕적 원칙들이 시민법에 반영되어 사회 안정과 품위를 지탱하는 한도” 내에서만 개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말한다.
“교회가 정치 세력이거나 그리 되려 한다는 비난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즉 교회의 국가 공적 입장을 맡은 자들-는 그 입장이 결백하고 의심받지 않도록 성스럽게 수호해야 한다.”
즉, 교회의 역할은 공적 문제에 대해 말할 권한이 있으나, 그 범위는 제한적이다. 사제와 주교는 구체적인 경제 정책이나 사회 프로그램에 대해 신자에게 지시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물론 버크는 ‘생활 임금’이나 ‘가족 임금’이 사회 정의의 핵심이라 보았지만, 구체적 제공 방식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주교들이 1919년에 채택한 『재건계획』(Fr. John Ryan이 초안한 좌편향적이고 세부적인 정책안)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라이언은 이후 NCWC의 사회행동부에서 일했지만, 슬로슨의 이야기 전반에 걸쳐 드러나듯, 버크는 라이언의 구상을 널리 알리거나 적극 지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활동을 제약하기도 했다.
넷째, 버크는 지속 가능한 정치적 설득 모델을 창안했다.
그는 아이티에서 피임 문제, 교회학교에 이르기까지 다루는 거의 모든 사안에서 反가톨릭 편견과 싸워야 했다. 1920년대 미국의 공적 광장에서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선 인권, 정의, 헌법 전통에 근거한 철학적 주장이 필요했다.
예컨대, 멕시코 문제에 있어 그는 종교 박해에 반대하는 보편적 미국 원칙에 근거해 교회-국가 갈등을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교회학교 방어는 부모 권리와 정부 권력의 한계에 관한 것이었다. 노동권과 가족 임금에 관한 주장은 교황 회칙을 인용하기보다는 불균형한 권력 구조 내에서의 공정함 회복이라는 세속 논리를 통해 전개되었다.
버크와 주교들은 법정에서도 종교적 호소를 삼갔다. 그들은 세속 법정에서 통할 수 있는 헌법 전문가들을 고용해 법적 논리를 제시했다. 버크 사후, 주교단은 더 나아가 『에버슨 판결』 이후 세속주의자들과의 법정 투쟁에서 자연법이 아닌 건국자들의 의도를 중심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이 전략은 성공하진 못했지만, 버크라면 역사적 논의에만 의존하는 것은 꺼렸을 것이다. 그는 피어스 사건 때처럼 도덕 원칙에 기반한 논증을 택했을 것이며, 그것을 미국식 정신에 연결했을 것이다.
이러한 설득 방식은 어느 정도는 현실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럼에도 미국 사회에서 가톨릭의 공적 참여를 정당화하고, 개신교 시민들과의 연대를 가능하게 했으며, 위계제도의 영향력을 견제하면서 평신도의 자발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모든 점에서 『The World and Work of Father John J. Burke』는 미국 역사와 미국 가톨릭교회의 형성기 이해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 그러나 이 책은 동시에, 그리고 내 판단으로는 가장 고무적인 방식으로, 슬로슨이 “행동하는 신비주의자”(a mystic in action)라고 묘사한 한 인물의 영적 전기로도 읽힌다.
슬로슨은 주교들이 얼마나 버크에게 의존했는지를 보여주며, 그가 사실상 “과로로 쓰러져 죽었다”고 말한다. 버크의 장례미사에서 강론을 맡은 에드워드 멀랄리 신부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그가 극도의 피로로 인해 거의 쓰러질 듯한 상태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느님과 교회, 조국에 바쳤다는 서약을 끝까지 지키려 했고, 이들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피츠버그의 휴 보일 주교는 버크를 “신비주의자, 사제, 그리고 유능한 공적 인물을 독특하게 결합한 존재”로 회고했다. 보일은 그가 공적 역할 속에서도 자신의 사제직을 철저히 내면화했음을 강조했다. 그는 성 바오로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끝>
“나는 살고 있다. 이제는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신다.” (갈라디아서 2:20)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