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36] 예배가 연극이 될 때
  • 칼 R. 트루먼 is a professor of biblical and religious studies at Grove City College and a fellow at the Ethics and Public Policy Center. 공공정책 센터 연구원

  • 최근 교회와 ‘성스러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리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곧,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러스티 레노(Rusty Reno)가 이 지면에서 지적했듯, 영국과 웨일즈처럼 지난 한 세기 동안 급격한 세속화가 일어난 나라들에서도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영국의 시사 주간지 ‘스펙테이터’는 젊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성스러움의 회복’에 관한 공개 토론을 개최할 예정이다. 세상이 점점 종교를 잃어가는 줄로만 알았던 이들에게는 참으로 기이한 시대다.

    이러한 경향이 기독교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라 예상하기는 어려웠지만, 어떤 초월적 맥락을 찾으려는 움직임 자체는 예견 가능한 것이었다.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이 거대한 우주에 무의미하게 던져진 우연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하기를 몹시 꺼려한다. 파스칼이 말했듯,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외롭고 두려운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니체의 통찰을 적용하자면,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것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존재’다. 따라서 포스트산업 시대의 관료화되고 소비지향적인 서구 사회가 보여주는 결함들이 드러나는 이 시점에, 인간들이 의미를 찾는 일에 더욱 집착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성스러움’에 대한 추구에는 분명한 한계도 존재한다. 우리 세계의 일상적인 내재성을 넘어선 어떤 초월적인 것 안에서 인간의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은 숭고하며, 피조물로서 인간이 지닌 가장 깊은 갈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성스러움(sacred)’이라는 용어만으로는 인간의 실존 문제를 진정으로 다룰 수 없다.

    그 단어 자체는 미적 성격을 띠며, 과거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이라는 개념과 유사하다. 그것은 어떤 중대한 인간적 경험을 암시하긴 하지만, 막연하다. 그런 이유로 전통적인 전례나 역사적인 예배 형식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세계의 ‘맛’을 제공해 준다.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충족시키며, 우리 자신과 일상의 물질주의 세계를 넘어선 더 크고 위대한 어떤 것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부여한다.

    저녁기도(Vespers)가 울려 퍼지는 대성당에 들어설 때, 인간 세계를 넘어 하늘로 솟구치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아치형 천장을 올려다볼 때,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현대 사회의 밋밋한 의례들—심지어 많은 현대 교회의 예배조차도—르네상스 시대의 폴리포니, 바흐의 칸타타,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가 주는 힘과는 견줄 수 없다. 그래서 요즘 젊고 지적인 이들이 교회 전통의 역사적인 양식을 통해 그들이 갈망하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진리’에 대한 관심과 혼동될까 우려된다. ‘성스러움’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특정한 진리 주장을 담고 있는 교리적 종교다. 사도 바울에서 루터, 뉴먼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신학자들이 이를 분명히 해왔다.

    기독교의 아름다운 찬송(Doxology)은 복음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며, 그 복음에 의해 이끌린다. 즉, 진정한 찬송은 그 기원, 내용, 형식에서 모두 교리적인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 Sayers)는 “기독교에서는 교리가 곧 드라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만일 우리의 교회 성전에서 펼쳐지는 드라마가 그 기원을 제공한 교리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단절된다면, 그것은 단지 ‘공연’이 될 뿐이다.

    미적이든 심리적이든 도덕적이든 우리의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는 있겠지만, 영혼에 어떤 초월적 가치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기독교는 막연한 ‘성스러움’에 대한 체험이라는 이름으로 치료적 체험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스러움이란 하느님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기독교는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도덕적 실패를 고백하게 한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앞에 설 자격이 없음을 깨닫게 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게 한다. 예배는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미적 체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가 성스러움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교리적인 탐구이어야 하며, 그래야만 참된 기독교적 탐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기독교가 인간을 변화시키고, 상호 사랑과 섬김이 특징인 공동체를 형성함을 명백히 밝힌다. 만일 어떤 이가 일요일에는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의 음악에 감동을 받지만, 평일에는 동료 기독교인들과 이웃을 조롱하고 비웃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예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예배를 감동적인 연극 공연으로 소비했을 뿐이다. ‘도덕주의적 치료적 이신론(Moralistic Therapeutic Deism)’은 미국의 일반 교회 복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회를 단지 자신만의 정서적 만족을 위한 공간으로 여기는 이들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교리, 찬송, discipleship(제자도, 주님을 닮으려는 노력)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 있는 기독교적 성스러움의 개념에서도 분리될 수 없다.

    현재 기독교에 대한 개방, 교회 출석에 관한 흥미로운 통계, 성스러움에 대한 탐색 등은 분명 감사한 일이다. 이는 예기치 않은 기회이며, 오래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곳에서 성스러움을 만나고, 그 자신도 성별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아름다운 예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예배는 믿음의 위대한 교리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그 교리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그의 임재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 드러내 준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6-26 07:23]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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