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유대인은 "신학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러나 중세 유대 사상가 마이모니데스의 『당혹한 자를 위한 길잡이』를 잠깐만 들여다봐도 그런 일반화된 주장이 틀렸음을 금세 알 수 있다. 물론 유대인 대화자들의 말은 과장이며, 본질적으로는 ‘토라 준수의 우선성’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유대교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의 이상”으로, 기독교를 “믿음을 고백하는 데 중점을 두는 종교”로 구분하고 있다. 나 역시 조금 과장하자면, 요지는 이렇다.
『유대교는 진리를 실천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기독교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에 집중한다.』
2024년에 출간된 『하느님에 대한 말(God-Talk)』에서 데이비드 노박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각기 다른 지적 전통을 형성해왔다는 명백한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 “신-로고스”(theo-logos), 즉 ‘하느님에 대한 말’에 주목하자고 도전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스스로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첫 번째 명령을 생각해보라.
“나는 너를 이집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너의 하느님 여호와다.”
이는 ‘명령’이 아니라 ‘선언’이다. 그리고 이 선언에는 신학적 의미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나는 나다(I am who I am). 내가 한 일을 기억하라.”
노박이 지적하듯, 앞부분은 철학적 사유를 유도하며, 이것은 랍비 전통에서는 부차적이긴 하 지만 결코 배제되지 않았다. 뒷부분은 하느님의 위대한 행위들에 담긴 통일성과 목적을 성찰 하도록 유도한다.
하느님은 누구신가? 무엇을 하셨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세속주의는 이 질문들을 던지는 것 자체를 억제한다. 대학에서는 그런 질문들이 거의 금기시된다. 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하느님 자신에 대해 말하는 일은 철저히 거리 두기를 유지한 채 2차적, 3차적인 방식으로 다뤄진다.
노박은 현대 학문에 적대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는 이 책(그리고 그의 다른 많은 저작들)에서 말한다. 하느님께서 스스로에 대해 말씀하셨기에, 우리도 직접적으로 하느님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하느님의 말씀 중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의 계명들이다.
노박은 몇 년 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한 저명한 랍비가 전통적인 유대인 학생들 앞에서 강연했다. 그는 ‘토라 준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학”이라는 개념에 너무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철학을 공부하던 한 여학생이 물었다.
“랍비님께서는 왜 유대율법을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따르시며, 왜 다른 유대인들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랍비는 “하느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그의 법을 배우고 지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여학생은 다시 물었다.
“그건 법적 명제입니까, 아니면 신학적 명제입니까?”
답은 명확하다.
“하느님이 유대인들에게 그의 계명을 배우고 따르라고 명령하셨다”는 말은 하느님이 누구이시며, 무엇을 하셨고,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에 대한 답이다. 바로 이것이 신학의 핵심 질문들이다.
노박은 이 랍비의 신학 무시가 너무 쉬운 타깃이 되는 것을 이해하며, 관대하게 평가한다. 그는 아마도 “신”을 추상적 개념이나 난해한 미스터리로만 다루는 서양철학의 전통에 대한 경계심을 가졌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시기에, 이런 식의 철학적 접근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 사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어떤 신학이 바람직한가’라는 핵심 질문을 회피하는 셈이다.
『하느님에 대한 말』에서 노박은 전통 랍비 가르침에도 신학 원리가 암시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미드라쉬(Midrash)는 유대 전통에서 신학적 해석의 도구이다.
출애굽기에서 하느님은 장막(성막) 건축에 대한 세세한 지침을 모세에게 주신다.
한 미드라쉬에서는 모세가 이를 반박하며 “전능하신 하느님이 그토록 작은 곳에 머무르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라고 항변한다. 그러자 하느님이 “네가 나에게 무엇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말하는 것이냐?”고 꾸짖는다. 이 미드라쉬는 하느님은 절대 물질 세계와 거리를 둬야 한다는 철학적 선입견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식 직설적인 신학 방식은 아니지만, 분명한 신학적 논의이다.
유대 전통은 철학 개념 없이도 신학화하는 방법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라시(Rashi)는 11세기 유대 랍비로서 매우 영향력 있는 토라 주석을 남겼다. 나는 과거 유대-기독교 성경해석의 권위자인 마이클 시그너와 함께 라시의 창세기 주석을 공부한 적이 있다. 라시는 매우 간결하게 쓰지만, 성경 다른 구절이나 랍비 전통을 인용함으로써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시그너는 성 보나벤투라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신학을 펼쳤다고 설명해주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1절에 대해 라시는 초기 랍비의 견해를 인용한다.
“토라는 출애굽기 12장 2절(‘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으로 삼으라’)에서 시작되었어야 했다.” 이는 유대인에게 주어진 첫 계명이 바로 출애굽기 12장 2절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그런데 라시는 “성경이 잘못된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식의 해석을 인용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신학적 판단을 전달한다. “하느님은 창조를 그의 언약을 위해 행하셨다.”
이는 칼 바르트가 말한 “언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라는 명제와 동일한 맥락이다.
『하느님에 대한 말』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 중 하나는 하느님을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갈망에 대한 논의다. 노박은 유대교가 ‘하느님을 듣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스라엘아 들으라!”)을 지적한다. 하느님은 볼 수 없다는 전통적 가르침도 인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63편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나는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성소에서 주를 찾았나이다.”
노박은 이 모순처럼 보이는 진술들을 신중한 구분과 분석으로 조화시킨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방식이다.
내 생각에 유대교가 기독교에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언약과 계명의 중심성’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특별하고, 교육적이며, 계명을 통해 전달된다. 계명은 불행한 제약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을 초월적 삶으로 끌어올리는 수단이다.
반대로 기독교는 유대인들에게 신학의 세계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할 수 있다.
하느님은 분명히 명령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우리 지성의 갈망이 향하는 진리이시다.
데이비드 노박은 유대 전통에 기반하여 유대인이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인 ‘말’을 할 수 있는지를 철저하게 설명해낸다.
기독교인은 더 순종적으로, 유대인은 더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하며 서로를 격려해 나가자.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