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39] 비평가 이후의 예수 ②
  • 마이클 C. 레가스피 is associate professor of Old Testament at St. Vladimir’s Orthodox Theological Seminary in Yonkers, NY. 정교 신학대학 부교수

  • 예수의 출생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책 전반에 걸쳐 반복된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고, 복음서 저자들의 관점을 구분한 뒤, 영지주의 문헌을 끼워 넣고, 마지막엔 “답을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낸다. 이러한 비결정적 태도는 과거의 비평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전의 예수 연구자들은 예수가 누구였는지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내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페이글스는 비판적 예수 연구의 선구자인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1694–1768)를 언급한다. 그의 사후 출간된 논문은 부활을 부정하고 예수를 실패한 혁명가로 그려 1770년대 학계에 충격을 안겼다. 페이글스는 라이마루스의 초상화가 1세기 맥락에 있어 그럴듯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해석은 “단순하고,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이라 평한다.

    이는 페이글스의 역사적 회의주의를 잘 보여준다. 라이마루스는 복음서의 신화를 걷어내고 진짜 인간 예수를 복원하려 했다. 초기 연구는 예수를 유대교 맥락에서 분리하고, 신성 의식에 초점을 맞추거나(슐라이어마허), 종교를 보편화하려는 자(르낭), 바리세적 형식주의에 맞선 진정한 덕의 수호자(부제) 등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알버트 슈바이처(1875–1965)는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로 보며 이러한 흐름에 반기를 들었다. 사해사본 발견은 제2성전기 유대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며, E. P. 샌더스와 게자 베르메스 등의 학자들이 예수를 ‘유대 개혁가’로 해석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의 『비판적으로 고찰된 예수 생애』(1835) 이후 나타난 또 다른 연구 흐름은 역사 속 예수를 찾는 것을 포기하는 경향을 보였다. 복음서에는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내용이 없으며, 예수를 메시아로 묘사하고 영원한 진리를 구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신화로 구성되었다는 것이 슈트라우스의 주장이다. 빌헬름 브레데는 『메시아적 비밀』(1901)에서, 복음서들은 본질적으로 저자들의 신학적 표현이라는 점을 들어 역사적 가치가 극히 제한적임을 강조했다. 제임스 던은 이에 대해, 현대의 예수 연구는 결국 예수가 아닌 복음서 저자 연구가 되어버렸다고 평했다.

    페이글스는 분명 이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 그녀에게 복음서는 예수 자체를 보여주기보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을 배제함으로써, 페이글스는 예수를 찾는 여정을 문학 비평으로 전환시킨다. 이는 객관적 진리를 도출하리라 믿었던 비평적 분석에 대한 탈근대적 회의이자, 형식 비평을 통해 문헌이 생성된 사회적 배경을 조명하려는 신뢰이기도 하다.

    예수가 전한 메시지 또한 확정적으로 재구성할 수 없다고 그녀는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발언은 다양한 해석 가능성 속에 안개처럼 남아 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소 더 확신을 가지는데, 그는 로마인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그러나 책임의 주체는 분명하지 않으며, 예수가 실제로 부활했는가에 대해서도 역사적으로는 불확실하다고 본다. 그녀는 N. T. 라이트의 입장을 소개한다. 라이트는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방법론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페이글스는 라이트의 공개토론 제안을 거절한다.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치는 ‘동부 자유주의자’의 역할에 끼워 맞춰 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수의 부활은 역사학자가 말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다”고 결론짓는다.

    페이글스는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예수가 공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살아났다고 주장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라이트도 이 두 사실은 역사학자가 수긍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할 것이다. 문제는 이 두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이다. 라이트는 부활을 제3의 독립적 사실로 보지 않고, 이 두 사실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최선의 역사적 추론으로 여긴다. 이는 단순하지만, 세상을 뒤흔드는 결론이다.

    반면, 페이글스의 “불가지론적 입장”은 이중적인 역사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타당하다. 그럼에도 그녀의 통찰—부활 신앙은 결국 역사 판단을 넘어선다는 주장—은 부정하기 어렵다. 결국 문제는 단지 한 남자의 전기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구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페이글스의 ‘역사적 예수’는 실체가 희박하다. 역사학자로서 그녀는 그에 대해 명확히 말할 수 없고, 이 책은 결국 “역사적 예수”라기보다는 “역사적 신비”에 관한 책이 된다. 예수가 어떻게 ‘하느님이 되었는가’를 다룬 짧은 장에서, 그녀는 초기 교회가 이 신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교리를 정립하며 표준화하려 했다고 본다.

    리옹의 이레니우스는 복음서를 넷으로 제한했고, 콘스탄티누스는 교리를 통일시켰다. 황제가 긴 신성 논쟁을 지루해하며 다수 의견이 형성되자 “그걸로 하자”고 했다는 식의 묘사는 조롱인지, 무지의 소산인지, 아니면 경박한 평인지 알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역사 신학에 큰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니케아 회의에 대한 짧은 언급 이후, 페이글스는 현대인들이 예수의 삶과 모범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았는지를 조명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마지막 장은 예술가, 영화감독, 공동체 등을 제시하지만 분명한 주제나 기준은 없다. 예수와 일부 기독교인에 대한 경외심과, 전통 기독교 외부에서 예수를 찾으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그녀는 “예수의 이야기 속에 영적 능력이 빛난다”고 결론짓는다. 복음서들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으로의 전환이 가능함을 보여주며, “하느님은 없는 길에서도 길을 만드신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정겹지만, 다소 얕고 역설적으로는 “신비롭지 않다.” 여섯 장에 걸친 논쟁을 이끈 뒤, 페이글스는 결국 복음서 저자들과 같이 “의미를 창조”한다.

    이 책은 예수의 실체를 분명히 보여주지는 않지만, 페이글스는 몇 가지 중요한 지점을 지적한다. 예수는 신비롭고, 그의 메시지는 난해하다. 복음서들은 서로 다르고, 객관적 보도라기보다는 신학적으로 구성된 문학 작품이다. 그리고 부활 신앙은 역사적 분석보다 사도들의 증언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도 옳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역사학자를 보낸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보내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게 하리라”(행 1:8)고 하셨다.

    결국 『기적과 경이』가 중요한 이유는, 한때 전통 신앙에 맞서 싸우던 현대 성서 비평이 이제는 후퇴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페이글스는 복음서가 예수를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해석이 유일한 것은 아니며, 역사비평은 복음서를 상대화하지만 폐기하진 않는다고 본다.

    이 책에서 비평은 다양한 관점을 허용하며, 개인적 의미 형성의 공간을 연다. 그러나 동시에 믿음의 여지도 남긴다. 한때 비평의 목표는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비평은 더 많은 질문만을 남긴 채 “역사적 신비”만을 안겨준다.

    페이글스를 감동시킨 것은, 사람들이 예수의 신비에 저마다 다채롭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들이 수세기 동안 선포해 온 것은 ‘인생의 의미’가 아니라 ‘생명의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만약 이 선포가 옳다면, 우리를 그 신비 속으로 이끄는 것은 “경이”가 아니라 “예배”이다.  <끝>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6-29 06:37]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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