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결혼이 미국에서 합법화되기 12년 전,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임을 밝힌 영국 작가 앤드류 설리번은 “우리는 이제 모두 sodomite(남색자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의 도발적인 발언 뒤에는 단순한 관찰이 있었다. 2003년 당시 이미 비생식적인 이성애자 간의 성관계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정상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버게펠 판결(동성결혼 합법화) 10년이 지난 오늘날, 설리번의 말은 그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 예언적이었다. 특히 Z세대를 중심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동성애자 혹은 ‘퀴어’의 한 형태로 정체화하고 있다. 최근 매튜 슈미츠가 지적했듯 이성애자들의 결혼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으며, 자녀를 낳는 비율은 그보다도 더 낮다(대신 반려견을 자식처럼 기르는 사람들은 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성애자 커플들이 단지 자녀 없음이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그 외의 측면에서도 점점 동성애자 커플을 닮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동성애자 문화의 한 요소였던 ‘폴리아모리(비독점 다자연애)’가 이성애자 사이에서도 점점 확산되고 있다. 오늘날의 연애 관계는 자녀 출산이나 가정을 꾸리는 목적보다 개인적 충족감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적인 ‘성 역할’은 더 이상 연애나 결혼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여성은 교육과 직장에서 남성을 앞지르고 있으며, 30대 초반이면 대부분의 여성은 성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생존 능력을 갖추는 반면, 남성은 여전히 안정된 직업도, 돈도, 방향감각도 부족하다. 이들이 결국 결혼하더라도, 여성 배우자가 주 수입원이자 관계에서 더 성숙한 쪽이 되어 사실상 주도권을 갖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러한 성 역할의 역전이 성별의 차이를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정체성과 무관하게 관계의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은 성별의 차이를 상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toxic masculinity 독성(유해) 남성성”에 대한 비난과 남성의 여성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오늘날 문화 전반에 걸친 메시지는 남성에게 본연의 남성성을 덕스럽게 단련하기보다는, ‘수동적이고 감정적으로 연약한 존재가 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이성애 관계에서 남성이 리더십을 포기하면, 여성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더 나아가, 오늘날 사회에서는 이성애 남성이 “나는 게이 남성과 함께 있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아”라고 말하고, 스스로를 “게이의 동맹자(ally)”로 자처하는 것이 더 고상하고 ‘진화된’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태도는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거리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카밀 팔리아는 1994년 저서 ‘Vamps & Tramps (뱀프와 부랑자)’에서 사춘기 소년들의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는 꼭 증오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끼리의 정체성 확인 방식일 수 있다고 말한다. “여성은 생리라는 생물학적 표지가 있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남성다움’이란 곧 ‘여성 아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남성에게 관통당하는 여성적 위치를 연상시키는 상황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녀는 이어 말한다. “진정으로 남성적인 아버지라면, 처음부터 여성스럽거나 예술적인 기질의 아들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의 남성성 결핍은 아버지의 정체성을 위협할 뿐 아니라, 남편을 아내로 녹여버리는 파괴 행위와 같기 때문이다.”
물론 성숙한 남성이라면 폭력은 자제하고, 동성애자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도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동성애자 남성과 함께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성애 남성은 어딘가 의심스럽고(솔직히 말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마치 동성애자 남성이 모두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원한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미있는 점은, 레이디 가가, 케샤, 케이티 페리 등이 동성애 찬가를 발표하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성애 여성 가수들은 자신의 남자친구가 너무 ‘게이 같아서’ 불평하곤 했다는 점이다. 2003년,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당신은 나보다 강해야 한다”고 노래했다. 그녀는 그가 항상 문제를 말로 풀려고만 한다며 짜증내고, 자신은 “여성처럼” 느껴지지만 그는 “여자아이” 같다고 말한다. 그녀는 “항상 내가 그를 위로해야 한다”며, 자신이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라고 토로한다. 노래 속에서 그녀는 “당신 혹시 게이야?”라고까지 묻는다. 심지어 동성애 지지로 유명한 케이티 페리조차 2008년 발표곡에서 “내 남자친구는 너무 게이 같아.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말야”라고 노래했다. 그는 너무 마르고, 메이크업도 그녀보다 더 많이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남성으로서 역할을 못해 자신을 스스로 거세시켰다고 암시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단순한 ‘남성의 여성화’ 이상의, 더 심각하고 ‘게이적인’ 문제라고 본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많은 동성애 남성들이 권위 없는 아버지와 지나치게 간섭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으며, 어머니가 아들을 정서적 파트너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그가 다른 남성을 성적 파트너로 추구하는 것은 ‘여성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적 반항’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는 오늘날 수많은 밀레니얼 이성애자 커플들 속에서도 발견된다. 경력을 정리하지 못하고, 가정을 위한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며, 아내의 격려, 방향 제시, 심지어 훈육까지 필요로 하는 남편들—이들은 단순히 ‘여성스러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성숙하지 못한 채 어머니의 품속에 머물러 있는 미성년적 존재일 수 있다. 아내를 어머니처럼 대하는 이성애자 남성과, 과거의 어머니에게 반발해 남성을 파트너로 택한 동성애 남성은 분명 다르지만, 이들은 ‘해소되지 않은 모성 콤플렉스’를 공유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남성의 도덕적 실패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오늘날 사회는 남성성과 아버지 권위를 악마화하고, 그 대신 ‘유모국가’와 같은 관료적 체계를 선호한다. 자신만의 책임감을 가지고, 가족과 공동체를 보호하고, 발전시키고, 싸우는 데 헌신하는 남성은 자동화와 세계화된 테크노크라시 확장에 위협이 되므로, 사회는 그런 남성을 경계하고 억제하려 한다.
이성애 커플의 변화가 전통적인 성 역할의 전복 때문이든, 프로이트식 심리 패턴 때문이든, 결론은 같다.
오늘날 이성애자 커플과 동성애자 커플의 모습은 점점 구별이 어려워지고 있다. 오버게펠 판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모두 ‘sodomite (남색자)’일 뿐 아니라, 이제는 모두 ‘게이’가 되어가고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