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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미국 사이의 외교적 해빙기에도, 한 여성의 삶은 붉은 이념 아래에서 짓밟혔다.
'한수'(Han Xu, Teresa Buczacki)는 그 잔혹한 세월을 온몸으로 겪은 뒤, 미국으로 돌아와 중국 공산당의 실상을 알리는 산증인이 되었다.
194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테레사 벅자키(한수)는 미국 외교관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미국이 아닌, 전란과 정치 선동의 중심지였던 '붉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1948년, 불과 두 살이던 한수는 어머니에 의해 중국으로 송환되어 외할머니 손에 자라게 되었고, 이후 30년을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보내게 된다.
■ 표적이 된 '미국 아이'
중국에서의 삶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혼혈의 외모와 미국 시민이라는 배경은 한수를 반복되는 정치 선전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1954년, 반미 시위에서 선생의 지시로 한수는 자신이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 성조기와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상과 함께 불태워졌다. 이 끔찍한 상징 행위는 그녀의 삶에서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1964년, 학업 성적으로는 대학에 진학할 자격이 충분했지만, '미국 외교관의 딸'이라는 이유로 입학이 거부되었다. 교감은 그녀에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강요했지만, 이를 거부한 한수는 산시성 농촌으로 하방되어 혹독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이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자, 한수는 신장으로 도피했고, 생산건설병단에서 위구르인의 박해 현장을 목격하며 9년을 보냈다.
■ ‘중국은 바뀔 수 있다’는 환상의 붕괴
한수의 이야기는 단지 한 개인의 시련만을 담고 있지 않다. 그것은 ‘교류를 통해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서방의 환상이 얼마나 허약한 신화였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반례다.
“제가 직접 걸어왔고, 직접 보았습니다. 그 정권에 어떻게 환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라는 한수의 말은, 오랜 세월 동안 미국 사회가 중국에 품었던 낙관론에 대한 뼈아픈 일침이다.
실제로 미중 수교를 위한 협상이 진행되던 1970년대 후반, 미국은 중국에 체류 중인 자국민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중국은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심지어 미국과 중국 간 비공식 연락창구 역할을 하던 왕빙난은 “중화인민공화국에는 미국인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바로 옆집에는 미국 여권을 가진 한수가 살고 있었고, 그는 이를 알고 있었다.
■ 단독 행동으로 철의 장막을 뚫다
1976년, 한수는 스스로 미 연락사무소에 들어가 미국 귀국을 요청했고, 마침내 1978년 1월, 중국 본토에 억류된 미국인 중 처음으로 귀국에 성공한다. 이후 300명 이상의 미국인이 뒤따라 중국을 떠났다.
귀국 후, 한수는 미 국무부 외교아카데미에서 강의했고, 외교관 남편과 함께 다시 베이징과 타이베이 등지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미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순진한 기대와 싸워야 했다. “그들은 직접 베이징에 가서 현실을 보고 나서야 눈을 떴습니다. 공산당이 직접 교육한 셈이죠.”
■ 오늘날에도 유효한 교훈
한수의 삶은 단지 한 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효한 경고다. 최근 미국의 대중국 정책은 '교류를 통한 변화'에서 '위험 제거', 심지어 ‘디커플링’으로 기조가 이동하고 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정치적으로 오히려 후퇴하고 있으며, 일당 독재의 본질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한수는 현재 서양 예술가들의 전기를 집필하며 조용한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중국 정부가 준 인간적인 추위와, 평범한 사람들이 준 따뜻함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저는 한 번도 중국과 중국 정부를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한수의 인생은, 이념의 냉기 속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려 했던 한 사람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 투쟁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장·춘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