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대 문화에 대한 ‘탈마법화(dis-enchantment)’ 논제에 익숙하다. 막스 베버가 20세기 초 이 개념을 제안했을 때, 이는 당시 서구 삶의 많은 측면에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지금도 그렇다. ‘과학’을 떠올려보라. 이성적으로 질서 잡힌 상상력과 실천이, 점차적으로 우리 일상 속 세계에서 영적 생명력을 소거한다. 오늘날 우리는 신들과 그들의 유령 같은 수행자들이 사라진 풍경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논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 편에 가깝다. 사람들은 여전히 마법과 초자연적인 것에 관여하고 있다. 비록 명시적인 종교 언어는 빠져 있더라도, 많은 이들이 세상에 대해 만들어내는 세속적 이야기(‘신화’)들 속에는 여전히 숨겨진 힘들—민족적 열정, 집단 에너지, 진보적 또는 전통주의적 유토피아, 시대정신 등—이 호소력을 가진다.
우리의 세계관은 여전히 성경적 세계관의 잔재에 의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고, 우리는 ‘저편’에서 오는 환상적인 암시, 자극, 위안을 계속해서 마주친다. 발달된 세계조차 여전히 ‘마법적’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논제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삶의 한 영역만큼은 탈마법화가 좀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정치 영역’이다. 이것은 공적 삶에서 하느님을 추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을 마치 어떤 마술사처럼—우리가 호출해 조작할 수 있는 힘을 부리는 존재로—여기는 실수를 경계해야 한다. 이는 범주 착오다. 하느님은 천사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화국(또는 공공질서)에서 제거해야 할 존재는 바로 천사들과 악령들이다.
물론 정치에서 천사의 역할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해왔다. 천사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때조차도, 주로 개인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에 국한된다. 천사는 보호하고, 악마는 공격한다.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다. 아마 그것이 마땅할 것이다.
사회적 삶의 영역에서 천사들은 눈에 띄게 부재하며, 이는 섭리적 이유에 따른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종종 정치적 불안을 야기한다. 우리는 자주 정치의 탈마법화된 현실을 보상하려는 듯, 적그리스도와 그를 지원하는 악령 관료 군단 같은 환상에 기대려 한다. 그러나 이는 생산적 반응이 아니다.
시편 82편은 이런 ‘영적 존재가 개입하지 않는’ 공적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훌륭한 본문이다. 이 시편은 하느님이 하늘 법정, 곧 ‘신들’ 가운데 앉으신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는 욥기 1장, 열왕기상 22장 등에서 보이는 장면과 유사하다. 하느님이 사탄을 포함한 그의 ‘아들들’과 대화하며 사명을 부여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시편 82편에서는 하느님이 이 하급 신들을 심판하신다. 그들이 세상 일을 불의하게 다스리며 악인을 편들었기 때문이다.
‘신들’, ‘하느님의 아들들’, ‘군대들’.. 하늘 법정에 누가 있는지 명확하진 않다. 신명기 32:8의 헬라어 번역본은 이들을 ‘천사들’이라 부른다. 하느님은 각 민족 위에 이들을 세우고, 야곱(이스라엘)은 특별히 자신 몫으로 삼으셨다(다니엘 10장 참조). 그러니까 여기엔 메대인, 이집트인, 박트리아인, 인도인, 미국인, 영국인, 슬라브족, 중국인, 쇼쇼니족 등 각 나라에 배정된 천사들이 있다.
이 천사들에게는 임무가 주어졌다. “약한 자와 고아를 위해 판결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를 위해 정의를 행하라”(시 82:3). 하지만 우리가 창세기 6장에서 보듯, 이 ‘하느님의 아들들’은 정욕적이고 탐욕스럽다. 이방 세계의 정의를 감독하는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은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저희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어둠중에 행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는도다”(시 82:5). 메시지는 명확하다. 천사적 정의의 실패가 세상을 붕괴 직전으로 몰고 간다.
전 지구적 재앙이 그려진다. 하느님은 이 천사 통치자들을 정죄하시고, 그들을 인간의 황폐함 속 먼지로 내던지신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 중 하나같이 넘어지리로다”(82:6–7). <계속>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