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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캡쳐 - 노동신문 17 |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최근 량강도와 남포시 등에서 진행된 ‘화선식 경제선동’ 활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른바 기동예술선동대, 방송선전차, 직관선전대, 5호 담당 선전원, 이동해설강사 등을 총동원하여 ‘현장 중심’ 선동전이 전개되었으며, 당의 정책을 고무·선동하고 대중의 열의를 북돋우는 데 목적을 두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대적인 사상전의 실체는 정작 경제성과와는 무관한 정치적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보도에서 북한 당국은 선전선동을 ‘혁명적 열정’과 ‘증산투쟁’으로 이어주는 원동력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는 실질적 생산력 제고나 구조적 경제 개선과는 거리가 멀다.
산업 현장에 예술공연과 구호를 보내고, 각종 시 낭독과 방송차량을 투입해 주민들에게 ‘투쟁하라’고 외치는 방식이 오늘날 21세기 산업경제의 혁신을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다.
북한 당국은 이번 경연 활동이 “뜬소리나 건수 채우기가 아니라 현실에 깊이 들어가 대중을 감화시키는 것”이라 주장했지만, 선동의 형식이 아무리 달라진다 해도 그 본질이 주민 개개인의 삶과는 무관한 정치적 충성 유도라면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 오히려 이러한 행위는 이미 삶의 피폐함에 시달리고 있는 주민들에게 정신적 부담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또한 노동신문은 “사상의 위력을 힘있게 과시할 굳은 결의”를 강조했지만, 이는 경제적 결실이나 생활의 질 향상에 근거한 자신감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복종을 전제로 한 결의에 불과하다.
‘북소리’가 울려퍼진다는 표현은 낭만적 포장에 불과하며, 실상은 문화예술의 정치도구화, 대중의 자율적 사고 억압, 그리고 비판 불허의 전체주의 선동 체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와 같은 선전선동이 열정의 원천이 아니라 공포와 감시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민들이 선동대 앞에서 “충성”을 외치고 “정신력”을 다짐하는 이유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동기가 아니라, 국가가 요구하는 충성의 형식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발성과 창의성이라는 생산적 사회의 핵심 자산을 근본부터 질식시키는 구조다.
결국 ‘화선선전’과 ‘화선선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련의 활동은, 경제적 침체와 구조적 결핍을 가리는 장막일 뿐이다. 북한이 진정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 한다면, 공연용 선동대보다 더 절실한 것은 자유로운 시장 접근, 과학기술 기반의 산업정책, 그리고 외부 세계와의 개방과 협력이다.
예술이 북을 치며 구호를 외치는 데 머무르는 한, 그 소리는 ‘희망’이 아니라 ‘허상’에 불과하다.
김·도·윤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