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역의 분쟁은 ‘정의로운 전쟁(Just War)’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다시금 공적 담론의 장으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민족국가 체제와 현대전 양상을 고려할 때,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당화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검과 창, 기병이 중심이었던 전근대적 무력 충돌의 시대에 형성된 이 윤리가, 주권국가와 정밀타격, 그리고 대리전쟁이 난무하는 탈산업 시대에도 과연 생존 가능한 윤리인가? 필자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이러한 도전에 응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위해선 이 전통의 보다 오래된 뿌리로 회귀해야 한다고 봅니다.
통상적 역사 서술에 따르면, 주권국가라는 개념은 30년 전쟁 종결과 함께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등장합니다. 중세의 신성로마제국은 유럽 각국과 도시국가에 복잡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국가 주권 개념이 확립되면서 그 영향력은 쇠퇴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전쟁의 윤리는 베스트팔렌 이전의, 곧 근대국가 이전의 질서 속에서 성숙해졌습니다. 그 이후 이 이론은 자위권 개념의 강조, 정의 침해에 대한 응징이라는 고전적 개념의 폐기 등 국가 주권의 틀에 적응해 나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정의로운 전쟁과 민족국가 사이의 긴장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주권국가는 전쟁을 논의할 때 ‘전쟁 원인’이 아닌 ‘중대 국익’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물론 경제 번영과 같은 중대한 국익이 위협받을 때, 정의로운 전쟁의 원인과 일치할 수는 있으나, 양자는 결코 동일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주권 개념 자체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여러 난제를 던집니다. 만일 주권이 정치공동체의 최고선이라면, 정의는 상대화되며, 자의주의적 해석에 빠질 위험이 커집니다. 즉, “나는 나의 국익을 스스로 정의하며, 이를 ‘방어’할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하는 식입니다.
반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각 정치공동체보다 상위의 규범 질서가 존재함을 전제합니다. 이 규범은 민족국가 안으로 침투하고 동시에 민족국가들을 서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의로운 전쟁은 ‘자연법’과는 긴밀히 연결되지만, ‘주권국가’와는 필연적으로 긴장 관계에 놓입니다. 전쟁에서의 정의는 교전 당사국들 사이에 일정한 도덕적 공통기반이 존재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대의 주권국가는 정당한 권위라는 정의로운 전쟁의 전통적 요소를 어느 정도 해소해 줍니다. 국가란 정치공동체의 실질적 단위이며, 전쟁을 합법적으로 개시할 권한을 가집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권위의 일원화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합니다. 즉, 비국가 행위자(non-state actors), 대리 세력, 그리고 기존의 전쟁 개념에 잘 들어맞지 않는 무력 사용의 형태들을 어떻게 정의로운 전쟁 이론 안에서 평가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전통 전체, 곧 베스트팔렌 이후의 개정판만이 아니라 고전적 정당 응징 개념 등을 포괄하는 초기 전통까지 되살려야 합니다. 근대 이후의 발전을 무시하지 않되, 보다 깊은 정의의 차원을 포용하고자 해야 합니다.
오늘날 "제한적 무력 사용"에 대한 도덕적 논의는 어느 때보다도 절실합니다. 마이클 왈처와 다니엘 브런스테터는 이를 정의로운 전쟁과 전면전 사이의 중간 범주로 분류합니다. 제한적 타격이란 국가가 더 큰 전력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특정 목표에만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고전적 정의로운 전쟁 논의에서 전쟁은 정의 실현의 수단이며, 그것이 제한적이든 전면적이든 정당한 목표, 비례성, 정의로운 명분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멘의 후티 반군에 대한 미국의 타격은 전쟁 선포 없이 몇 달에 걸쳐 간헐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이 타격은 후티가 홍해와 아덴만에서 국제 항로를 교란한 데 대한 대응이었으며, 이는 고전적 정의로운 전쟁에서의 정당한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상업 선박의 보호와 악행에 대한 응징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한적 타격이 남용될 경우, 특히 공중전력에 지나치게 의존될 경우 위험을 초래합니다. 드론과 같은 무인 전력의 사용이 늘어날수록 그러한 타격의 비용은 낮아지고, 결과적으로 남용의 유혹은 커집니다. 또한 제한적 타격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정의로운 전쟁의 핵심 원칙들—특히 ‘비례성’—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대리전쟁은 더욱 까다롭습니다. 대리전은 실체적 충돌의 동기와 책임 주체를 감추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윤리적 판단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대리전도 전혀 새로운 개념은 아닙니다. 근대 이전에도 존재했던 현상이며, 적국에 손해를 입히면서도 자국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 매력을 지닙니다.
대리전에서 중요한 것은 ‘올바른 의도’입니다. 만약 실제 정의 침해가 있었고, 정치적 이유로 직접 개입이 어려워 다른 수단으로 싸우는 것이라면 도덕적으로 복합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적을 약화시키기 위해 위기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명백히 부정의한 의도입니다. 양쪽 모두, 정의로운 전쟁의 기준인 ‘비례성’ 판별은 어려운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멘의 예로 돌아가면, 제한적 타격과 대리전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란의 대리세력들은 오랜 기간 미국과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국가가 직접 싸우는 것과 대리세력을 통해 싸우는 것 사이의 도덕적 차이는 무엇인가? 고전적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서 대리세력은 더 큰 국가의 동맹이거나, 정당한 권위를 갖지 못한 ‘소공동체’로 간주됩니다.
도덕적으로는, 이들의 행동은 그것을 지휘하거나 무장을 제공하는 국가의 권위에 좌우됩니다. 이 경우 이란이 그 권위를 행사하는 국가입니다. 따라서 대리세력의 행동은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결국 이란의 행위로 귀속됩니다. 미국은 이에 대해 제한적 타격으로 대응하며 전면전을 피하고자 합니다.
모든 전통이나 윤리체계는 시대 변화에 적응해야 하며, 그럴수록 핵심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전쟁의 핵심은 다름 아닌 ‘정치공동체 간의 정의를 무력을 통해 수립’하려는 것입니다. 외교 역시 그 목적은 같으나, 수단이 대화일 뿐입니다. 대화가 실패하고, 정의에 대한 반복적 침해가 계속될 경우, 국가들은 때로 전쟁을 선택합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정의로운 전쟁 전통을 따른다고 해서 모든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전통은 생각보다 훨씬 더 엄격한 제한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세계를 직시하고, 정의를 위한 정당한 수단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무력을 통한 정의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살아남을 것이며, 현대전의 수단을 넘어 그 전통의 뿌리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위권에 의한 전쟁마저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