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53] 사적인 종교라는 궤변
  • 베델 맥그루 Bethel McGrew writes the newsletter Further Up. 뉴스레터 기고가

  • 최근 영국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 크리스 코글런(Chris Coghlan)이 자신의 '파문(excommunication)'을 트위터에서 자진 발표하면서, '가톨릭 트위터' 상에서 보기 드문 일치된 반응이 일어났다.

    이는 코글런 의원이 영국의 조력자살 합법화 법안에 찬성표를 던질 경우, 교회의 눈으로 볼 때 은총의 상태(state of grace)에서 이탈하게 된다는 경고를 자신의 본당 사제 이안 베인 신부(Fr. Ian Vane)로부터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코글런은 이를 무시했고, 이에 따라 베인 신부는 그에게 성사(Sacraments)를 거부했다. 신부는 본당 신자들 앞에서 코글런의 이름을 언급하며 공개적으로 꾸짖었고, 이에 코글런은 더욱 공개적인 방식으로 맞대응한 것이다.

    코글런이 가장 우려한 것은 회개나 성찰이 아니라, 베인 신부가 더 이상 자신의 자녀들을 가톨릭 학교에 보내는 데 필요한 서명을 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는 모든 국민의 대의자인 국회의원으로서 "나의 개인적인 종교(private religion)는 나의 직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코글런이 대중의 동정을 기대했다면 크게 착각한 셈이다. 하지만 그의 지역 교구장 주교는 사태 수습에 들어간 듯하다. 이는 2014년,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주교회의가 ‘동성 결혼’에 찬성표를 던진 국회의원들에게 성체성사(Eucharist)를 거부할 계획은 없다고 서둘러 해명했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지닌 이상적인 영국 사회였다면, 베인 신부의 조치는 그리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코글런이 말하는 '개인적인 종교'란 대체 무엇인가? 분명 말기 환자에게 독극물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교의조차 포함되지 않는 듯하다. 그는 출산 직전까지의 낙태를 합법화하는 법안에 대해서는 찬반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기권했다. ‘종교’는 코글런에게 있어 진리 추구가 아니라, 정치인의 겉치장일 뿐이다. 그의 정체성은 결국 "유권자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는 정치인"에 머문다.

    이러한 태도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libertarian individualism)와 정확히 궤를 같이 한다. 보수당 소속 하원의원 대니 크루거(Danny Kruger)는 오늘날 영국에서 이 사상이 사실상 "통치 종교(governing faith)"로 자리잡았다고 지적한다. 크루거는 복역자들을 위한 자선단체 운영 후 국회에 입성한 복음주의 개종자다. 그의 종교는 "사적인 영역에 국한된 신앙"이 아니라 직무에 분명한 영향을 주는 신앙이다.

    그는 정치적 '비인기'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심지어 존엄사 문제에 있어 자신의 어머니이자 유명 방송인인 프루 리스(Dame Prue Leith)와도 공개적으로 입장을 달리했다. 공적 영역에서 전인적 신앙을 실천하려면 그 정도 대가는 필수다.

    코글런이 종교를 '사적인 영역'으로 밀어넣으려는 구태의연한 주장은, 종교가 비합리적이며 그 도덕적 명령은 자의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예를 들어, 크루거처럼 낙태나 조력자살에 반대하는 기독교 정치인은 ‘신앙에 눈이 멀어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자’로 간주된다.

    이런 정치인에게는 마치 자신의 ‘비이성적 동기’를 커밍아웃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압박이 가해진다. 그러나 크루거가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에 기고한 짧은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생명 존중(Pro-Life)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모두가 접근 가능한 공개적인 이성의 논증이다.

    자연법(Natural Law) 전통 안에서 안락사를 반대하는 논증을 형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독교인들이 괜히 진지한 무신론자들까지 혼란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어떤 무신론자들은 교리를 외면한 사제들보다 더 정확히 문제의 본질을 꿰뚫기도 한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논리적으로 접근 가능한 어떤 것도, 결국 그 ‘ontological(존재론적)’ 기반은 신적 창조 질서에 의존한다. 이 기반이 사회 전반에서, 심지어 성직자들에 의해까지 버림받는다면, 결국 그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크루거가 말하듯, 영국이 기독교적 닻을 놓아버릴수록 상실하는 것은 회복 불가능한 것들이다.

    믿음이 없는 이가 흐름에 역행해 생명을 선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고도의 정신적 용기와 지적 일관성을 요구하며, 코글런의 사례는 그런 자질이 얼마나 희귀한지를 보여준다. 자유주의 개인주의가 국가 종교로 자리잡으면, 이를 거스르려는 이들이라도 대규모 연대 없이는 동기를 부여받기 어렵다.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이 안락사에 반대하며 체제에 도전했을 때, 그가 거의 기독교인들과만 함께하게 된 이유도 여기 있다. 그는 유일한 인물이었지만, 기독교인은 많다.

    코글런의 사제를 지지하는 멜라니 맥도너(Melanie McDonagh)는 이렇게 썼다. “어떤 양심적인 개인이라도, 신앙 없이도, 조력자살 법안에 대해 신중하고 합리적인 이유로 반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연약한 자들을 보호하려는 관심이 기독교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특권’은 아닐지 몰라도, 실제로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자주 나서는 영역이기도 하다. 이 점이 불편한 질문을 제기한다. 왜 그런가? 그러나 이는 아마도 영국에서 세속국가의 신성한 교리에 저항하는 가톨릭 병원을 폐쇄하려는 관료들에게는 고민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크루거는 「에블린 워(Evelyn Waugh)」의 어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적은 이제 모든 위선을 벗어던지고 드러났다.” 진보의 정치가 드디어 종교의 형상을 갖춘 것이다. 이 새로운 ‘신앙’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낡은 신앙뿐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7-13 09:34]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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