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거나, 찢거나, 훼손하지 마시오”(Do not fold, spindle, or mutilate)는 1950년대 IBM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하던 천공 카드에 인쇄된 문구였다. 당시 이 원시적인 계산 기계들은 건물 전체 층을 차지하곤 했다. 그런데 이 경고 문구가 최근 수십 년 동안 반복되어온 실망스러운 현상—즉, 정의전쟁 전통의 도덕 분석이 마구 구겨지고, 찢기고, 훼손되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특히 이스라엘과 미국이 6월 이란에서 수행한 군사작전에 대해 세속 언론과 종교계의 논평들 속에서 자주 일어난 일이다. 정의전쟁의 교회적 전통은 왜곡되고, 전도되며, 결국 그 본래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몇 가지 기본적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이 손상된 도덕적 사고를 조금이나마 회복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곧 ‘정의전쟁’ 전통에 있어 무엇이 아닌지, 그리고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오류 1 : 정의전쟁 사유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가정’을 전제로 시작한다?
그렇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전쟁론’은 그로부터 시작하지 않았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전쟁론’도 그렇지 않았으며, 오늘날의 어떤 진지한 정의전쟁론도 그런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정의전쟁 사유의 출발점은 다음과 같다. 즉, 정당한 공권력이 자신에게 맡겨진 생명 공동체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무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행될 수 있으며, 그 중 하나가 바로 비례성과 구별성을 갖춘 무력의 사용이다.
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가정’이라는 개념은 정의전쟁 전통의 내적 논리와 도덕적 추론 구조를 왜곡시킨다. 이는 마치 정의전쟁 사유를 공적 권위가 넘어야 할 일련의 윤리적 장애물이나, 하나씩 체크해야 할 윤리적 박스들로 전락시키는 셈이다.
그러나 정의전쟁 사유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윤리학자, 시민사회, 그리고 정부 당국이 함께 협력하여 '언제'와 '어떻게' 비례적이고 구별적인 무력이 평화와 정의, 자유의 목적에 봉사할 수 있는지를 숙고하는 도덕적 틀이다. 당연히, 이러한 성찰에 참여하는 세 당사자 모두가 이 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존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전쟁은 언제나 부정의하다”고 선언하는 성직자들은 이러한 이해를 증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저해할 뿐이다.
오류 2 : 정의전쟁론은 선제공격 또는 선제타격을 배제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2019년 영화 미드웨이를 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윌리엄 할시 제독과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전단은 1941년 12월 7일, 해병대 전투기를 웨이크 섬에 인도한 후 하와이로 귀항 중이었다. 당시 일본 해군 제1항공함대의 기동부대인 기도부대(Kido Butai)는 미국의 탐지를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할시 제독이 이 기도부대를 발견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나구모 제독이 단지 와이키키 해변 부동산을 살펴보기 위해 하와이로 오고 있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이미 1937년 중국 침공,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 등으로 제국주의적 침략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 엔터프라이즈의 정찰기들이 일본 함대를 발견했다면, 진주만 공습을 막기 위한 선제 타격은 정의전쟁의 관점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었을 것이다. 일본의 침략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으며, 단지 어뢰기와 폭격기들이 이륙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란은 수십 년 동안 미국(큰 사탄)과 이스라엘(작은 사탄), 그리고 더 나아가 서방 세계에 대해 전쟁을 벌여왔다. 그 결과 최소 천 명 이상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묵시론적 광신자들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정권은 핵무기를 단지 억지력 확보나 허세용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훨씬 더 위험하고 실질적이다. 따라서 이란 정권이 핵무기의 대량파괴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은 도덕적이면서도 전략적으로도 절박한 과제였다.
이 경우, 외교가 명백히 실패했고, 다양한 형태의 공격이 이미 진행 중이었으며, 정권의 의도 또한 분명했다. 그러므로 선제조치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중장기적으로 어떠할지는 지금 당장 확정할 수 없다 해도 말이다.
오류 3 : 정의전쟁론에서 ‘최후의 수단’은 가장 첫 번째 원칙이다?
그렇지 않다.
정의전쟁 전통에서 말하는 ‘최후의 수단’은 모든 상상 가능한 비무력적 해결 수단이 모두 소진되어야만 무력 사용이 도덕적으로 허용된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 그 ‘최후’에 도달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중재 시도”, “마지막 제재”, “마지막 경고선”은 언제든지 하나 더 상상할 수 있다. 이는 고립주의적 우파와 실질적 평화주의 좌파가 최근에 잘 보여주었다.
따라서 ‘최후의 수단’이라는 정의전쟁 기준은 시작점과 종착점이 분명히 알려진 일련의 과정의 끝점으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오히려 공격 행위가 이미 발생하고 있고, 이를 반드시 응징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무력적 수단이 모두 실패했다는 판단은 계량적 계산이 아니라 정보에 기반한 신중한 판단에 따라 내려져야 한다.
이러한 정의전쟁의 원칙들은, 오늘날의 세계 현실을 고려할 때, 더욱 널리 알려져야만 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