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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캡쳐 - 노동신문 32 |
기억은 거룩할 수 있지만, 그 기억만으로 오늘을 지배하려 한다면 그것은 역사 왜곡이자 현실 도피다.
북한 노동신문은 최근 「그때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장문의 사설을 통해, 오늘의 북한 주민들에게 1950년대 전쟁세대의 '영웅정신'을 따라야 한다고 독려하고 있다.
이는 겉으로 보자면 조국에 대한 충성과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기사로 보일지 모르나, 실상은 인민의 고통을 미화된 전쟁의 추억에 묻어버리고, 오늘날의 빈곤과 억압, 실패한 경제를 정당화하려는 체제 방어의 교묘한 장치에 불과하다.
죽음으로 살아남기를 강요하는 정권의 논리
“락동강을 넘으며 더운 피를 뿌리고 허리띠를 조이면서도 혁명가를 불렀던 1950년대처럼 살고 있는가?”라는 반복된 문장은, 오늘날의 북한 주민들에게 전쟁 중 자살적 충성을 강요한 시기를 이상향으로 삼으라는 지시다.
이는 실질적으로는 _정권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라_는 명령이며, 인간의 기본권과 생존권을 무시한 전체주의적 선동이다.
그 시대의 ‘영웅’은 대부분 생존을 위해 선택의 여지 없이 죽음에 내몰린 이들이었다. 그들을 존경할 수는 있지만, 그와 같은 삶을 오늘날 반복하라는 요구는 국민을 영원한 전쟁상태 속의 소모품으로 취급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노동신문은 ‘천리마 기적’과 ‘복구건설의 신화’를 오늘날의 생산 현장에 연결시키며 “전후복구건설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이 수사는 철저히 조작된 이미지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시 북한 주민들은 극심한 기근과 노역에 시달렸고, 체제 유지와 무기 개발을 위한 수탈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 엄연한 역사다.
오늘날에도 “상원 시멘트 공장의 증산 투쟁”을 ‘정치투쟁’으로 치켜세우며, 경제 실패의 책임을 다시금 주민들에게 떠넘긴다. 국가적 무능과 고립의 책임은 김정은 체제의 전략적 오판에 있음에도, 이를 “정신력 부족”으로 몰아가는 식이다.
개인의 삶은 무의미한가?
북한의 이념 선전은 철저히 개인의 삶과 욕망, 존엄을 부정한다. "조국이 있어야 나도 있다"는 식의 구호는 듣기에는 거창하지만, 결국 ‘조국’이라는 이름의 권력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비인간적 통치 방식이다.
‘수령의 명령 앞에 오직 “알았습니다”라는 대답만 알았던 시대’를 이상으로 제시하는 것은, 오늘날도 무조건적인 복종과 사고 정지를 강요하겠다는 암시이다. 이는 민주주의나 자유,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는 전형적인 독재 언어다.
“그때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물음이다. 올바른 질문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그때처럼 살아야만 하는가? 아직도 희생을 강요받는 체제가 정당한가? 과거는 배우되, 반복해서는 안 되는 고통스러운 기억이어야 한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전쟁세대의 고통을 추모하며 그 희생 위에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건설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그 고통을 되풀이하게 만들고 있으며, 심지어 이를 찬양하며 미화하고 있다.
오늘의 북한 주민들이 필요한 것은 ‘영웅정신’이 아니라, 자유롭게 꿈꾸고, 말하고, 먹고, 살 수 있는 _보통 사람의 삶_이다. 그리고 그 삶은 결코 과거의 참호 속이 아니라, 미래의 문명 속에서 가능하다
김·도·윤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