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년 전, 나는 중국에서 일주일간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관한 철학 세미나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참석자는 중국 일류 대학의 젊은 철학자 40여 명이었고, 강의실 뒤편에는 중국 공산당 간부들이 참관인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정장을 입고 강의했지만, 나와 함께한 또 다른 도미니코회 교수 모두가 사제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학생들은 식사 시간에 우리와 좀 더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었다. 다수가 비(非)그리스도인이었지만, 거의 전원이 서양 철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학생에게 질문했다. “중국인인 당신이 왜 중세의 서양 기독교 철학자인 아퀴나스를 공부하느냐”고. 그의 답변은 잊을 수 없다. “신부님, 1960년대 문화대혁명은 현대 중국 문화를 그 역사적 전통과 도덕적 유산으로부터 단절시켰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공산주의가 실패한 체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인생의 의미는 아직 모릅니다. 어쩌면 그 의미가 기독교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말이 예언적이라고 느꼈다.
사실,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의 역사로부터 단절된 존재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세속적 질서만이 실재하는 전부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서구 역사 발전의 종착지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갈수록 불만족을 동반한다. 세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느낌 말이다.
그런데 이 중국 학생은 인류 역사상 가장 혹독하게 종교를 탄압한 체제에서 자라났음에도, 종교적 제안을 향해 마음을 여는 순진무구한 영혼의 상태, 곧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진지한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탈세속적 질서’와 새로운 종교성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통찰은 단지 중국의 상황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영적 현실에 대해서도 정확했다. 우리는 세계적 종교 갈등과 핵전쟁 위협,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서구 세계의 실존적 권태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인생의 의미’는 21세기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철학과 자연과학은 어느 정도 해답을 줄 수 있다. 훌륭한 철학자는 하느님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매개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지성과 자유를 통해 영혼의 존재를 분별할 수 있지만, 죽음 이후 그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철학도, 정치도, 기술도 인간이 겪는 도덕적 혹은 물리적 악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한다. 결국, 종교와 계시에 관한 논의는 언제나 회피할 수 없는 문제로 남는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톨릭 신학이 직면한 도전이자 기회는, 바로 ‘하느님과 강생의 신비’에 비추어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설명하는 데 있다.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선 ‘계시된 진리’에 대해 솔직하고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가톨릭 신학은 단순히 영적인 것이 아니다. 신학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묵상과 사랑으로 초대하는 동시에, 설명하고 해석하는 사명도 갖는다.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신비를 통해서만 우리는 인간 자신과 창조 질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진리는 창조의 본래적 선함과 인간 문화를 보호하고 고양시킨다. 삼위일체의 인식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장 깊이 인식하게 된다. 반대로, 삼위일체를 모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불투명해진다. 삼위일체와 강생은 이 세계에 대한 궁극적 설명을 제공한다.
이제 나는 그 논지를 더 펼쳐보고자 한다.
■ 신경, 계시, 그리고 현대 자유주의에 대한 신학적 응답
21세기 가톨릭 신학의 첫 번째 목표는 ‘신경(creed)에 대한 지성적 탐구’에 있다. 우리는 공적 담론 속에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신경의 의미와 합리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초세기부터 그리스도교의 의미와 성경 해석 방법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하였고, 그러한 논쟁은 신경의 형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예를 들어, 2세기 로마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사도신경’은 가장 오래된 신앙 고백문 중 하나이며,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제정된 ‘니케아 신경’은 오늘날까지 미사 중에 낭송된다.
신경은 단순히 어떤 집단 소속을 표시하는 의례적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reality)에 관한 주장을 명시하고, 근본적이며 궁극적인 해석을 제시하는 진리 명제이다. 신경은 신비를 가리키지만, 신비란 결코 이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초월적 이성성(super-intelligibility)을 지니며, 평생에 걸쳐 공부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신학이란 무엇인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이란 "신경을 통해 하느님을 관망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곧, 신앙의 교리가 우리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 빛 안에서 모든 것을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강생’, ‘은총의 삶’, ‘교회의 신비’, ‘성사들’, 그리고 ‘인간 본성’은 모두 삼위일체의 빛 안에서 가장 온전히 설명될 수 있다.
신학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의해 모든 것을 함께 조망하는 지식의 체계이며, 학문적 탐구이다. 신학은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어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바탕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인식하게 한다. 기독교의 핵심 전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내밀한 생명을 우리와 나누고자 하셨다는 것’, 곧 ‘하느님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키려 하셨다는 점’이다.
그 정점의 신비가 바로 ‘삼위일체’이다. 하느님 안에는 태초부터 존재하시는 영적 아버지, 곧 ‘성부’가 계신다. 그분은 자신의 ‘로고스(말씀)’이신 ‘성자’를 영원히 낳으시며, 성자를 통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 또한 성부는 성자 안에서 영원히 발출하시는 ‘성령’의 원천이 되신다. 성령은 사랑 자체이시며, 만물은 이 사랑 안에서 창조되었다.
이 삼위일체적 비전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성과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하며, 선물로서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세상은 지성적으로 이해 가능하며, 우리는 세상에 대해 인식하고 이해를 발전시킬 수 있다. 실재는 창조주 하느님의 지혜를 반영하며, 근본적으로 선하다. 악의 현실이 역사 안에 존재하지만, 그 악조차도 ‘사랑이신 하느님’, ‘속죄와 부활의 하느님’, ‘화해와 자비의 하느님’의 섭리 아래에 있다.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이해하게 한다. 인간은 로고스와 사랑을 위해 창조된 존재이며, 하느님과의 우정을 위해 존재한다. ‘희생적 사랑’, ‘인격 간의 친교’, 이것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우리는 단지 진화한 동물이 아니라, 비물질적 영혼을 지닌 영적 동물, 자유롭고 진리를 사랑하도록 창조된 ‘하느님의 형상’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유할 수 있는 존재, 즉 하느님을 수용할 수 있는 존재(capax Dei)인 것이다.
21세기 신학은 이런 진리에 대해 담대함(confidence)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계를 가장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계시된 진리를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비를 가리킬 때, 우리는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 그리고 인간 존재의 실체를 동시에 밝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하느님의 빛도 사라지고, 인간의 존엄 또한 사라진다.
현대 서구 사회는 신학이 사라진 세계가 얼마나 강력한 기술과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지만, 그 대가로 인간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잊고, 삶의 목적과 정체성을 잃었다.
칼 바르트는 자신의 책상 위에 한 그림을 두었다. 그것은 16세기 초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제작한 제대화의 인쇄본이었다. 이 그림은 원래 수도원 병원에 설치되었으며, 그림 속의 그리스도는 성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의 모습으로, 칠흑 같은 밤 배경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맞고 있다.
이 그림은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희망에 찬 작품이라 불린다. 역사의 최악의 순간, 곧 죄악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인성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지만 바로 그 죽음 안에서 하느님은 자비로운 죄 사함과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궁극적인 선을 이루신다.
십자가 위에 서 있는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다. 그의 손은 과장되게 확대되어 있으며, 그는 세상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가리키고 있다. 바르트는 이 요한을 신학자의 모습으로 해석했다. 신학자는 비록 그리스도 앞에서는 비천한 존재일지라도,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 즉 삼위일체의 사랑이라는 세계의 근원적 신비를 가리키는 자다.
21세기 신학은 하느님을 관상하고, 그분을 가리키며, 기쁨과 결단으로 세상을 하느님의 빛 안에서 설명하려는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신학은 신경에 기반해야 한다. <계속>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