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80] 민주주의는 종교를 필요로 한다 - 그러나 어떤 종교인가?
  • 피터 J. 라이하트 is president of the Theopolis Institute, Birmingham, Alabama. He posts regularly at his Substack, Notes from Beth-Elim. 테오폴리스 연구소장

  • 독일의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는 근대성을 ‘세 겹의 가속화’의 산물로 규정한다. 기술은 이동과 의사소통의 속도를 높이고, 기술 변화 자체도 가속화되며, 그 결과 세대 주기가 짧아지고 가정이 해체되고 직업이 평생의 소명이 되기보다는 몇 년 만에 바뀌는 등 사회생활 전반이 더 빨라진다.

    일상은 분주하고 조급해진다. 수많은 노동 절감 기기가 넘쳐남에도 우리는 여유롭게 식사하지 않는다. 더 빨리 먹고, 덜 자고, 타인과의 교류도 줄어든다. 이러한 가속화는 근대가 약속한 정치적 비전을 무너뜨린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속도를 늦추고, 숙고하며, 깊이 고려해야 하지만, 현대의 가속화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지도자들이 해법을 마련하기도 전에 문제는 바뀌어 버린다. 근대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실상 우리를 쳇바퀴 속의 실험용 쥐처럼 느끼게 만든다.

    ‘공명(共鳴, resonance) 어떤 물체가 자신의 고유 진동수와 일치하는 외부 진동을 주기적으로 받을 때 진폭이 크게 증가하는 현상. 공진(共振)’은 가속화가 입힌 손상을 치유한다. 로자는 그의 최신 저서 『민주주의는 종교를 필요로 한다』에서 사회적 공명을 매력적인 음악적 비유로 풀어낸다.

    공명을 생각할 때, 플룻이나 목관악기 앙상블보다 더 좋은 영감을 주는 예는 찾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들 악기에서는 공명이 직접 들리고 신체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악은 우리를 둘러싼 물질적, 사회적, 영적 조건들을 문자 그대로 진동시킨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호흡은 악기와, 또 연주자 자신들과, 연주가 이루어지는 공간과, 의미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존재로서 서로 간에 공명하기 시작한다.

    목관악기 섹션처럼 조화를 이룬 사회 - 이는 진실로 갈망할 만한 성취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가속화 상태에서 공명 상태로 나아갈 수 있을까? 로자는 솔로몬이 말한 “듣는 마음”(1열왕 3,9)을 길러야 한다고 단언한다. 세상과 타인에 대해 열린 마음, 수용하는 자세, 응답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응답하게 만드는 힘은 종교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로자의 종교론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에, 그는 책의 서두에서 현대사회를 날카롭게 진단한다. 그는 이를 ‘광적인 정지 상태(frenetic standstill)’라고 묘사한다. 우리는 앞으로 밀어붙이고, 혁신하며, ‘파괴적 변화’를 추구하지만, 정작 전진이나 진보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진보는 ‘에너지 포획’에 달려 있다. 음식 저장은 먼 조상들이 겨울을 버틸 수 있는 체력을 제공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인간의 노동력을 덜 들이고도 더 많은 것을 성취한다. 집을 덥히기 위해 굴뚝에 땔감을 넣는 대신, 온도 조절기를 한 번 돌리는 것으로 충분할 때, 우리는 에너지를 ‘포획’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제자리에 서 있기 위해서조차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현재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생산성을 높이고, 최적화하며,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자동차 산업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차, 새로운 모델, 새로운 장치를 만들어낸다. 그렇지 않으면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고 경제는 급전직하한다.

    더 많은 주택, 더 나은 컴퓨터, 더 나은 스마트폰이 필요하다 - 그렇지 않으면 해당 산업이 붕괴한다. 멀쩡한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야 하며, 이는 패션 산업이 존속하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원하는 것은 단순히 탐욕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기존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필요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를 만들어버렸다.

    로자는 이런 성장 집착을 비이성적이라고 본다. “성장이 어디에서 이뤄져야 하는지 밝히지 않은 채, 추상적으로 성장을 말하는 것은 진정 어리석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속도를 유지할 수도, 따라잡을 수도 없고, 그 결과 정신 건강 위기와 번아웃(소진)이 발생한다.

    이러한 성장 중독은 ‘세계에 대한 공격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하며, 언제든 공격할 태세를 갖춘다. 정치 담론은 고함으로 가득 차 있고, 각 진영은 상대를 “침묵시켜야 할 혐오스러운 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공격 모드에서는 작동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발언권을 주려면, 모든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호명 가능성의 위기(crisis of invocability)’
    에 직면해 있다.

    이 지점에서 종교가 필요하다. 로자는 덧붙여 말한다. 이는 서로를 차단하는 교조적 종교가 아니라, 경청, 인격적 만남, 변화를 촉진하고 겸손을 길러주는 종교다. 종교는 공명이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목관악기 앙상블의 ‘연습실’을 마련한다.

    성찬례(Eucharist)는 “세 개의 공명 축을 동시에 활성화하는 예식”의 대표적 예다. 첫째, 사람들 사이의 공명(사회적 축), 둘째, 사람과 사물 사이의 공명(물질적 축), 셋째, 모든 것을 포괄하는 타자(하느님)와의 공명(존재론적·수직적 축)이다. 성찬례의 열매는 “코무니오(communio), 곧 사람들 사이의 관계이자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와의 관계”다.

    로자의 사회 위기 진단은 경청할 가치가 있고, 종교를 옹호하는 그의 논지는 일정 부분 매력적이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점도 있다. 무엇보다 로자는 ‘공명’을 최고 개념으로 만들고, 종교를 그 아래에 종속시킨다. 종교가 공명을 촉진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생활의 기준은 공명이 아니라 하느님이어야 하지 않는가? 

    로자는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종교가 어떤 종교인지에는 무관심하다. 단, 하느님을 정의하고, 교리로 가르치며,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거나 “하느님께서 원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진 종교는 아니라는 것만은 안다. 그가 쓰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타자”라는 표현이 이를 잘 드러낸다.

    로자에게 종교는 누군가가 자신의 신앙 내용을 단언하는 순간 끝이 난다. “종교가 무엇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을 괴물로 변형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목소리에 귀를 닫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의 ‘뱀’ 이야기는 믿지 않는 듯하다.

    로자는 가끔 모든 종교가 동일하거나 민주주의와 똑같이 양립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민주주의는 종교를 필요로 한다』는 2022년 뷔르츠부르크 교구에서 행한 강연에서 비롯되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말하면서 그는 “사회학자로서 힘겹게 떠올린 많은 생각들이 이미 신학적 맥락에서 정식화되어 있었다”며, 그 대표적 예로 ‘공명’ 개념을 들었다. 그가 이러한 통찰을 산출한 종교가 어떤 종교였는지 더 깊이 성찰했다면, 그의 책은 훨씬 더 나아졌을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8-09 07:23]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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