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81] 포스트-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
  • 매튜 슈미츠 is the editor of Compact and a former senior editor of First Things.
    컴팩트(Compact) 편집장

  • 1996년 11월 6일, 앨 고어(Al Gore)는 피터 나바로(Peter Navarro)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의 뜻을 전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캠퍼스의 좌파 성향 경제학 교수이자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한 민주당 후보였던 나바로는 전날 선거에서 패배했다. 나바로는 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며 “클린턴-고어 행정부에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어는 “방법을 알아보겠다”고 답했지만, 결국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2016년,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세계를 놀라게 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나바로는 트럼프 선거 캠프의 자문역으로 합류했고, 이후 백악관에서 여러 고위직을 맡았다. 특히 트럼프의 ‘해방의 날(Liberation Day)’ 관세 정책을 설계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으며, 2020년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는 시도에 대해 증언을 거부하고 4개월간 수감생활을 하면서까지 보여준 트럼프에 대한 충성심은 그의 위상을 높였다.

    한때 자유주의 성향의 교수이자 ‘클린턴 민주당원’이었던 인물이 어떻게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참모가 되었을까? 이 변화의 배경에는 정치적 재편과, ‘캘리포니아 드림’을 두고 벌어진 두 가지 상반된 이해가 있었다.

    하나는 개방성의 창조적 잠재력을 강조하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한계를 강조하는 관점이다. 나바로는 1986년, 애플의 매킨토시가 세상에 나온 지 2년 후, 지금 우리가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것이 형성되던 시기에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히피식 사회실험과 우파적 기업가 정신 숭배를 결합한 것이었으며,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을 특징으로 하여 이후 일론 머스크(Elon Musk)와 같은 테크 거물들의 정치 성향에도 깊이 스며들었다.

    나바로 역시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이었지만,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 추종자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시장 실패를 바로잡고 공동선을 수호하기 위해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이 무제한적 자유를 추구할 때, 그는 도시 개발, 무역,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미국을 위협한다고 느끼는 여러 힘에 대한 ‘제한’을 주장했다. 이런 직관이 결국 그를 ‘트럼프식 우파’로 이끌었다.

    그의 정치 경력은 시민운동에서 시작됐다. ‘성장 제한 시민회(Citizens for Limited Growth)’의 공동대표로, 이어서 후속 단체 ‘로스앤젤레스화 방지 모임(Prevent Los Angelization Now)’의 대표로서, 그는 샌디에이고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정부 개입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확신은 1992년 시장 선거, 1993년 시의회, 1994년 카운티 감독위원회, 1996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 출마로 이어졌으나, 모두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1999년 출간한 자서전적 선거 회고록 『샌디에이고 기밀(San Diego Confidential)』에서 그는 무분별한 개발의 위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유시장과 계획 부재 속에서, 개발업자들은 돈이 된다면 모든 언덕을 평탄하게 만들고, 모든 협곡을 메우며, 멸종위기종을 없애고, 습지를 아스팔트로 덮어버릴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그는 특정 지역을 개발에서 보호하고, 개발업자가 필요한 공공시설과 기반시설 비용을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는 “여성의 낙태 선택권을 지지하는 진보주의자”임을 자부했고, 주사기 교환 프로그램과 동성 커플의 가정 파트너십도 지지했다. 그러나 좌우를 막론하고 경쟁자들보다 훨씬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그가 도전했던 현직 의원 브라이언 빌브레이(Brian Bilbray)는 낙태 선택권을 지지하고 기업친화적인 ‘서퍼 정치인’이었으며, 민주당 경선 상대 낸시 카새디(Nancy Casady)는 성적 자유를 실험하는 단체에서 강사로 일한 이력이 있었다. 또 다른 후보 ‘미스트리스 매디슨(Mistress Madison)’은 성인산업 종사자 출신으로, 정부는 “사업, 은행 계좌, 침실에서 손을 떼라”고 주장했다.

    이 혼합된 구도 속에서, 자유방임보다 제한의 필요성을 강조한 인물은 나바로뿐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의 핵심 가치와 어긋나는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반(反)성장 운동을 이끌던 신념—즉, 시장은 실패하고 정부는 개입해야 한다—은 훗날 보호무역 지지로 이어졌다. 2000년대 초, 그는 야간 강의를 듣던 젊은 직장인들이 일자리를 잃는 것을 목격했고, 조사 끝에 중국과의 무역이 ‘윈-윈’이 아니라 미국 산업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민 문제에 대한 입장도 변화했다. 1990년대 회고록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2010년에는 불법 이민자의 자녀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변화는 ‘트럼프주의적 대중주의’가 쇠락한 철강도시와 황폐한 시골 마을뿐 아니라, 세계 경제 최전선에 서 있는 캘리포니아에서도 싹텄음을 보여준다. 빅터 데이비스 핸슨(Victor Davis Hanson)과 미키 카우스(Mickey Kaus) 같은 캘리포니아 출신 논객들은 이데올로기의 ‘문화·경제 개방성’이 예상보다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고 보았다.

    비록 1990년대에 표방했던 사회적 자유주의를 공개적으로 철회한 적은 없지만, 나바로의 자유무역 반대 논지는 점점 보수적으로 변했다. 2017년, 그는 제조업 일자리 감소의 비용에 ‘마약·오피오이드 사용 증가’, ‘사망률 상승’, ‘이혼율 상승’, ‘낙태율 상승’ 등을 포함한 메모를 작성해 일부 트럼프 행정부 인사를 놀라게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그는 무역 정책을 둘러싸고 일론 머스크와 충돌했다. 나바로는 머스크를 ‘자동차 제조업자’가 아닌 ‘자동차 조립업자’라고 폄하했고, 머스크는 그를 ‘벽돌 자루보다 멍청하다’고 맞받았다.

    나바로의 진정한 중요성은 개별 경제분석이나 선거전략이 아니라, 정치 우선순위의 전환을 예견하고 주장한 데 있다. 그는 ‘포스트-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한때 캘리포니아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요소들이 사라졌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그것은 문화·경제 개방성이 사회적 신뢰와 공동 번영을 무너뜨렸다고 경고하며, 미국 문제의 해법이 때로는 국가의 적극적 개입에서 나올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캘리포니아가 미국 자유 추구의 절정일 뿐 아니라, 그 추구가 종착점에 다다른 곳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8-10 07:04]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 다른기사보기 리베르타임즈 기자의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