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州) 미식축구에서 안전은 우리의 제1 우선순위입니다!”
대학 미식축구 선수들을 위한 최신식 헬멧을 홍보하는 SNS 게시물에 붙은 현수막의 문구입니다. 마찬가지로, I-81 고속도로를 달리는 대형 트레일러 뒤편의 스티커에는 “안전 제일!”이라고 쓰여 있고, 한 건설현장 입구 표지판에는 “안전모 착용 – 안전 제일!”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허구입니다. 안전이 정말 절대적 1순위라면, 더 나은 헬멧을 만들 이유조차 없을 것입니다. 미식축구팀 자체를 없애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대형 트레일러를 몰지 않을 것이고, 특히 고속도로 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건설 현장에 발을 들이는 일도 금지되어야 합니다.
“안전 제일”이라는 구호는 언제나 거짓이며, 심지어 위험한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실제 우선순위를 가리고, 신중한 위험 분별(prudential risk analysis)을 방해하며, 인격 형성을 왜곡시킵니다.
미식축구팀이 선수들의 안전을 위하여 더 좋은 헬멧을 마련한다 해도, 팀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안전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드러냅니다. 곧, 힘과 용기, 협동심이라는 덕(德), 경기와 관전의 기쁨, 캠퍼스와 지역사회의 연대감, 그리고 수익입니다. 마찬가지로 운송회사가 운전자의 안전을 고려하고, 건설회사가 작업 중 부상을 피하고자 한다 해도, 우리가 트럭을 몰고 건물을 세우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국가의 생산성을 높이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함입니다. 그 모든 과정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그렇다면, 어떤 우선순위는 안전보다 앞서야 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아야 할까요? “안전 제일”이라는 구호는 이런 질문에 대한 진솔한 논의를 가로막습니다.
만약 미국 사회가 정말로 전 영역에서 “안전 제일” 사고방식을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은 사실상 이 질문에 대한 전국적 실험을 해왔습니다. 그 실험 대상은 바로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안전 제일’이 가장 충실하게 실현되는 곳은 양육, 놀이터, 그리고 학교입니다. 조너선 하이트가 《미국 정신의 응석받이화》(2018, 그렉 루키아노프와 공저)와 《불안한 세대》(2024)에서 보여주었듯, “안전주의(safetyism)”는 다른 요인들과 결합하여 우리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연약하고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안전 제일”을 추구한다는 것은, 알든 모르든, 그들의 인격 형성을 왜곡하더라도 육체적 위험을 피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왜곡된 인격 외에도, ‘안전 제일’ 환경에서 자란 청소년은 신중한 위험 분별력을 기르지 못합니다. 놀이터가 온통 스펀지와 고무로만 되어 있다면, 아이들은 나무나 철과 부딪쳤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비교적 통제된 환경에서 배울 기회를 잃습니다.
청소년에게 전동 공구나 기계를 다루는 유익한 일을 시키지 않는다면, 힘을 책임 있게 다루기 위해 필요한 주의와 집중을 익히지 못하게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만약 청소년들이 운전 중 부주의를 해도 차가 스스로 도로를 유지해 주는 첨단 안전장치에 의존한다면, 차량 안에 있는 사람은 보호될지 몰라도 차량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발달 단계에 맞는 도전을 직면하고 극복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존재론적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라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과제를 맡기고 있습니다.)
“안전 제일”은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거부입니다. ‘안전주의’ 아래에서는 산은 오르지 못하고, 황야는 탐험되지 못하며, 바다는 항해되지 못하고, 홍수 피해자는 구조되지 못하며, 화재는 진압되지 못하고, 폭군은 도전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위대함은 거의 항상 일상의 인격 수련, 곧 평범한 인간적 탁월성(human excellence)으로 향한 양성에서 비롯됩니다.
화염 속으로 들어가는 소방관은 어려움이나 위험에도 불구하고 선을 추구하는 용기의 덕을 길렀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스승의 인도 아래, 신중한 위험 감수(prudential risk-taking)를 통한 역량과 인격의 보통의 발달이 위대함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특히 청년 남성들은 ‘안전주의’ 체제에서 시들어갑니다. 모든 문화권에서 청년 남성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며, 때로 주변에서 무모하다고 여길 행동을 해왔습니다. 현대 심리학은 이를 청소년기의 전전두엽(前前頭葉 prefrontal lobe) 발달 미완성 때문이라고 설명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참된 설명은 이것을 독특한, 비록 위험하지만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보는 것입니다.
곧, 위험을 인지하면서도 나아가는 능력—폭풍 속에서 돛을 조정하고, 전투 한가운데로 전진하며, 공동체와 가정, 때로는 마음에 둔 여인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런 청년 남성의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안전주의’라는 부드러운 억압은 곧 부드러운 거세로 이어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청년 남성이 반발하여, 신중한 위험 감수가 아니라 무모함으로, 공동선 지향의 힘이 아니라 반사회적 공격성으로 치닫습니다. 그 해결책은 타인을 위한, 그리고 자신의 인격 수련을 위한 사려 깊은 위험 감수에 대한 멘토링입니다.
세인트 던스턴 아카데미의 ‘조슈아 프로그램—버지니아 블루리지 산맥의 176에이커 농장에서 고등학교 졸업생(17\~20세)을 위한 농사·기술·인격 Gap Year 과정’에서 우리의 모토는 “안전 제3원칙(Safety Third)”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든 줄 알았지만, ‘더티 잡스’의 마이크 로우가 이미 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벼운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3위도 여전히 높은 우선순위입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기꺼이 희생해야 할 것은 많습니다. 그러나 결코 희생해서는 안 되는 더 높은 선(善)들이 있습니다.
우리 프로그램에서 가장 위험한 활동은 주 2회 성당(Church)에 가는 길입니다. 통계적으로 자동차 사고 가능성이 작업장 사고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가자들은 교육과 멘토의 인도 아래, 전동 공구, 전기톱, 트랙터를 운전합니다. 2,000파운드(약 900kg)짜리 목조 벽체를 세우기 위해 A-프레임 크레인을 제작하는 법도 배웁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들은 단순히 위험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높은 선이 걸려 있을 때 위험을 받아들이는 현명하고 신중한 위험 감수로 형성됩니다.
우리의 청년들, 특히 청년 남성들이 역량과 인격에서 성장하고, 참으로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안전’을 ‘제3의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