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과거 ‘low-church 저교회, 성공회 내에서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신학적 조류’ 성향의 개신교 신자였다가 가톨릭교회에 입문한 후,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는 가톨릭의 성사와 전례, 의식적 전통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10대 시절 처음 이탈리아에서 성유물(聖遺物)을 보았을 때, 물리적 사물에 대해 거의 ‘숭배’에 가까운 경외심을 드러내는 모습에 진심으로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가톨릭이 현재 세상 안에서의 악과 맞서 싸우는 데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 가치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고통과 비극이 너무나 많으며, 그 상당 부분은 그리스도께로의 회귀를 통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2025년 대희년을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희년(禧年) 전례는 성경적 기초를 지니고 있습니다. 레위기 25장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십니다.
“너희는 그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희년이 될 것이다. 너희 각자는 자기 소유지와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레 25:10).
이후 본문에서는, 사실상 종살이에 팔려간 이들이 희년에 해방될 것임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희년의 시기에 정의와 자비를 강조합니다.
“이 희년에는 모두 자기 소유지로 돌아가야 한다. 네 동족에게 땅을 팔거나 그에게서 땅을 살 때 서로 해치지 마라”(레 25:13-14).
가톨릭교회가 처음으로 희년을 선포한 것은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 때였습니다. 그는 1299년 성탄 무렵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로마에 몰려드는 광경을 목격하고, 죄의 용서를 강조하는 한 해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황이 깨달았던 바는 지금 교회가 깨닫는 바와 같습니다. 전쟁, 역병(코로나19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일상의 죽음 속에서, 인류는 외적인 ‘영적 재설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현대 사회는 이미 성경의 권고를 기억하던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가톨릭교회의 보편성과 사도적 권위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온갖 군중심리와 매스미디어의 소음 속에서, 교황은 하느님의 백성을 생명과 구원의 본질로 초대하는 가장 강력한 ‘강론대’를 지니신 분입니다. 디지털 기술이 가져온 만연한 불안의 시대에, 교황 레오 14세는 젊은이들을 위해 열린 ‘청년 희년’ 행사에서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어디에 있든, 위대한 것을, 곧 성덕을 향하여 열망하십시오.”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결코 적은 것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복음의 빛이 여러분 안에서, 그리고 여러분 주변에서 날마다 더 밝게 비칠 것입니다.”
레오 교황 자신이 그 모범입니다. 검소한 가정에서 자라셨지만, 그는 위대함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립 대학교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공부하셨고,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이끄셨으며, 페루에서 신자들을 사목하셨습니다. 이는 열망하는 모든 이가 공감할 수 있는 지도자의 삶입니다.
저는 ‘Z세대’로서, 젊은 세대가 과거보다 훨씬 쉽게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기성세대를 자주 만납니다. 일부는 나아진 점도 있습니다. 일부 인턴십이 유급이 되기도 하고, 특정 계층에겐 의료 서비스 접근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주거비는 훨씬 더 비싸졌고, 대학 등록금도 천정부지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미국 대통령의 대중영합주의가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레오 교황께서는 결코 “지금이 역사상 가장 좋은 시대”라는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으십니다. 백만 명이 모인 군중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만든 가장 심각한 악으로 고통받는 청년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까이 있습니다.”
이 모든 점을 종합해 보면, 가톨릭교회가 여전히 많은 개종자들을, 특히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자 하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워싱턴 D.C.에서 그것을 직접 목격해 왔습니다. “중심은 버틸 수 없다”는 격언이 사실임을 느낍니다.
루터교회와 같이 역사 깊은 교회를 택하는 젊은이들은 대개 가정적 연고가 있습니다. 오히려 가톨릭이나 복음주의로 들어오는 이는 종종 개혁교회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터교와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혼합 가정의 자녀들 중 상당수도 궁극적으로 로마 가톨릭에 입교하는 경향을 저는 보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최근 수십 년간 가톨릭교회가 보여준 사회 교리와 도덕적 사안에 대한 일관성과 굳건함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은 시대정신에 굴복한 다른 교회들의 몰락을 목격했고, 그 시대정신이 자신들을 결코 행복하게 하지 못했음을 경험했습니다.
한마디로, ‘이혼’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태동한 교회에 이혼 가정의 자녀가 들어갈 가능성은 낮습니다. 제도와 교회의 항구성을 중시하는 가톨릭의 전통은,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가톨릭교회가 영향력 있는 이들이 찾는 새로운 ‘주류(Mainline) 교회’로 자리매김하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