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84]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일방적 교황중심주의’를 ‘일방적 주교중심주의’로 대체했는가?
  • 토머스 G. 과리노(Thomas G. Guarino) is professor emeritus of systematic theology at Seton Hall University and the author of The Disputed Teachings of Vatican II: Continuity and Reversal in Catholic Doctrine. 신학 명예교수

  • 잘 알려져 있듯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단순히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사실상 전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친 대단히 특별한 사건이었다. 공의회 신학자들은 전통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를 보존하고자 하였고, 동시에 성경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촉진하며,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일치(ecumenical)적 관계를 진전시키고, 특히 유다교와의 종교 간 대화를 시작하는 데 열망을 보였다.

    그러나 공의회를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그것이 더 이상의 균형 조정이 필요 없는 완전무결한 사건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공의회에서든, 그리스도교 교리의 일부 요소에 강조점을 두면 필연적으로 다른 요소들은 그림자 속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제직 신학이다. 저명한 루터교 역사학자 마르틴 마르티(Martin Marty)의 촌평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승자’는 주교들과 평신도들이었고, ‘패자’는 사제와 수도자들이었다.” 다소 과장이 섞였지만, 마르티의 지적에는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공의회는 주교직과 평신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진전시켰지만, “사제나 수도자로 존재해야 하는 새로운 신학적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제직에 관한 교령인 사제직 사목 교령(Presbyterorum Ordinis, 사제의 사목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의 수용도 최선의 경우에조차 미온적이었다.

    주요 공의회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이브 콩가르(Yves Congar)는, 해당 교령의 초안이 이미 작성된 후에야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회의장을 둘러보며 “여기에는 [칼] 라너나 심지어 파렌테만큼의 인물도 없다”고 평했다. (대교구장 파렌테는 당시 교황청 교리성에서 활동하였으며, 콩가르는 차차 그의 신학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콩가르는 결국 “이 문헌은 경건하고 장황할 뿐, 충분히 신학적이거나 존재론적이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고 결론지었다.

    공의회 폐막 10년 후인 1975년에도 콩가르의 평가는 변함없었다. “공의회 교부들은 사제를 잊어버린 듯 보였다. 물론 문헌이 있었지만, 매우 보잘것없고 서투른 메시지가 공의회 막바지에 서둘러 작성된 것이었다. 나는 항의했다. 사제들은 훈계가 아니라, 그들이 누구이며 오늘날 세상에서 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누군가가 분명히 말해주기를 필요로 한다.”

    비록 콩가르가 수정안 작업에 참여했지만, 그는 여전히 “이 문헌은 사제들의 기대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다. 나는 이 문헌을 여러 번 해설해야 했다”고 인정했다. ‘사제직 사목 교령’이 지적·영적 영양분을 주었다고 말하는 사제는 드물다. 이 문헌은 언제나 공의회 문헌들 가운데 비교적 약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 약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교회의 교리헌장 ‘루멘 젠티움(Lumen Gentium)’ 작업에 참여한 이들의 일지를 살펴보면, 교황을 ‘교회 안에’ 확고히 위치시키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주교(특히 비오 12세와 같은 전형)가 주교단과 유리된 채 고립적이고 독단적인 인물로 변해가고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로잡는 한 방법은 초대 교회에서 활발했던 주교단(collegium episcoporum)의 강한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물론 교황 수위권은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교황직은 항상 주교단의 질서 안에서 존재한다. 이 때문에 ‘루멘 젠티움’의 초안 작성자였던 루벵 대학교 신학자 제라르 필립스(Gérard Philips)는 “교회의 머리”(caput Ecclesiae)라는 표현을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께만 사용하고, 교황에게는 “주교단의 머리”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중요한 신학위원회의 조정자였던 필립스는 중도 성향의 신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나의 개입은 혁명적이지 않았으며, 아마도 그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점에서 확고했다. 곧, 주교의 법적 권한은 로마 주교의 위임이 아니라 주교 성품성사(주교 서품)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이는 1943년 회칙 ‘신비체(Mystici Corporis)’의 가르침과는 달랐다.

    필립스의 의도는 교황이 속한 강력한 주교단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교황 바오로 6세와의 비공개 알현에서도 이 점을 고수했고, 회담은 다소 긴장된 분위기였다고 전해진다. 필립스는 바오로 6세가 공동합의성(collegialitas)의 지지자라고 확신했으나, 어떤 주교들은 공동합의성의 강조가 ‘교황 수위권’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일부는 공동합의성을 “자선적 관심” 정도로 축소하여, 교황이 가끔 다른 주교들의 자문을 구하는 수준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필립스는 가르침(교도), 성화, 통치의 권한이 모두 주교 서품과 함께 부여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교 서품과 사목 관할권(jurisdictio)의 내재적 결합이야말로 “공의회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모든 주요 공의회 문헌 작업에 참여한 인물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매우 놀라운 진술이다. 그러나 필립스는, 주교단이 가톨릭교회에서 실질적 의미를 가지려면 그 권한이 직무상(ex officio) 주어져야 하며 교황의 위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는 “베드로는 첫째(protos)이지만 결코 홀로가 아니다”(마태 10,2)라고 즐겨 말했다. 공동합의성은 교회가 교황 절대주의의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이 논의의 요점은, 공의회에서 주교단 공동합의성을 둘러싸고 수년간 치열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사제직에 관한 논의는 거의 사후적이었다. 물론 공의회는 ‘신자들의 사제직’을 강조했는데, 이는 성경(1베드로서)에 나타나며,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강조했던 주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과제는 세례성사로 받은 사제직을 강조하되, 그리스도의 직무 사제직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었다. 필립스는 이 두 사제직이 어떻게 그리스도 한 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지를 세련되게 설명해냈다.

    그러나 직무 사제직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실질적 서술이 없었다. 교황직을 주교단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 신학적으로 타당하다면, 주교직도 사제단 안에 명확히 위치시켰어야 하지 않았을까? 교황이 어느 정도 주교단에 책임을 지듯, 주교들도 사제단(그리고 본당 사목자를 통해 평신도)에게 보다 명확히 책임을 졌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위험은 주교들이 종종 사제들과 단절된 ‘고립된 신분층’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미국 가톨릭대학교 ‘가톨릭 프로젝트’의 전미 가톨릭 사제 연구(National Study of Catholic Priests)를 보면, 많은 사제들이 허위 고발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했으며, ‘댈러스 헌장’(Dallas Charter)과 그 규범 때문에 적법절차 없이 권리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이로 인해 주교와 사제 사이에는 심각한 간극이 생겼으며, 조사 결과 무려 76%의 사제들이 미국 주교단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교회 생명에 극히 불건전한 현상이다.

    게다가 주교들은 이 헌장을 자신들에게 적용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3년 반포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Vos Estis Lux Mundi)' 이후에도, 고발된 주교에 대한 절차는 사제들보다 훨씬 신속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주교들은 과거 교황이 차지한다고 여겨졌던 ‘고립되고 초연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듯하다. 교황과 사제단의 관계에 대해 공의회가 다루지 않았던, 더 강한 신학적 연결이 필요하다.

    나는 한 신학적으로 통찰력 있는 주교와 대화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교구에서 가톨릭 신앙의 ‘판관(judex)’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궁극적 판관임은 맞지만, 결코 유일한 판관은 아니라고 답했다. 교구에는 신학자들, 사제평의회, 평신도평의회가 있으며, 이들 모두가 각기 다른 차원에서 가톨릭 신앙의 판관들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그에게 존 헨리 뉴먼의 성공회 신앙의 중도(Via Media) 서문을 권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 서문에서 뉴먼은 교회 전체—주교, 사제, 평신도—가 신앙을 수호하고 보존하며 발전시키는 과정에 책임을 지는 역동적이고 다중심적인 권위 구조를 제시한다. 그는 “신학은 교회 전체 체제의 근본적이고 규율적인 원리”라고 말하며, 신학의 특별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어떤 공의회도 모든 것을 다 하지는 못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여러 면에서 탁월한 성취였다. 그러나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일방적 교황중심주의를 낳았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일방적 주교중심주의를 낳은 것은 아닐까?

    오늘날의 신학적 과제 가운데 하나는 주교들을 자기 교구 사제단 안에 보다 명확히 위치시키는 것이다. 사제, 신학자, 평신도의 지혜가 ‘자선적 관심’ 이상의 방식으로 주교의 사목 활동을 인도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는 소외된 사제들과 고립된 주교계층만 남게 될 것이다.

    작은 예 하나를 들어보자. 최근 미국에서 수도회 출신 주교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하고 싶다. 여러분이 옛 수도 공동체와 우애와 애정을 나누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자기 교구 사제단의 일원이다. 수도복을 벗고 수도회 이니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고려하라. 교구 사제들과의 일치를 드러내고, 그들과의 연대를 받아들이라.

    고립된 주교직은 25년 전, 주교들이 공포에 질려 ‘댈러스 헌장’을 통과시켰을 때도 분명히 드러났다. 그 헌장은, ‘전미 가톨릭 사제 연구’가 보여주듯,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요한 결여—곧 주교와 사제 간의 강력한 신학적 관계의 부재—를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그 결여를 의도적이고도 단호하게 바로잡아야 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8-13 07:35]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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