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99] 우크라이나와 참된 평화
  • 조지 바이겔 George Weigel is Distinguished Senior Fellow of Washington, D.C.’s Ethics and Public Policy Center, where he holds the William E. Simon Chair in Catholic Studies. (워싱턴 D.C. 윤리 및 공공정책 센터 수석 연구원)

  • 교황 레오 14세의 영적 나침반은 성 아우구스티노이다. 재임 첫 달에 교황께서는 교회가 기도와 금식, 그리고 활동을 통해 21세기의 전쟁 종식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영적 지향과 호소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가능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도록 이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걸작 하느님의 도성 (De Civitate Dei)에서 “평화”를 질서의 평온(tranquillitas ordinis)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는 이사야서 11장 6절에 묘사된, 맹수와 먹잇감이 공존하는 평화―에드워드 힉스의 62점의 「평화로운 왕국」 그림이 표현하는 그 비전―가 아니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가 알았던 바와 같이, 그것은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의 평화이며, 시간의 완성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이 온전히 성취되고 하느님께서 “만물 안에서 모든 것”(1코린 15,28)이 되실 때 주어질 평화이다. 또한 그것은 신자들이 주님의 식탁에 나아가기 전 서로에게 건네는 ‘평화의 인사’도 아니다. 그 평화는 그리스도 주님과의 친교에서 비롯되며, 그분을 통해 형제자매들과 맺는 친교의 평화이다.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질서의 평화’는 보다 소박한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정의로운 정치적・법적 질서 위에 세워져, 민족들이 안전과 자유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갈등은 계속되지만, 그러한 갈등은 대규모 폭력이 아니라 법과 정치의 수단으로 해결된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작동하는 도시, 국가,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평화’이다.

    세계 질서 속에서 이와 같은 평화를 건설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과제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20세기의 두 차례 파괴적인 전쟁과 그 이전 수 세기의 유혈 투쟁 끝에, 21세기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존재하는 평화가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 아우구스티노적 관점은 우크라이나의 평화 문제에 무엇을 시사하는가? 역사적 일화 하나가 그 성찰을 날카롭게 해준다.

    윈스턴 처칠은 그의 저서 ‘제2차 세계대전사’ 제1권에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 연합군 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원수가 베르사유 조약을 두고 한 말을 인용한다. “이것은 평화가 아니다. 단지 20년간의 휴전일 뿐이다.” 실제로 포슈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요점은, “평화”란 단순히 적대 행위의 종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의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살육이 멈춘 뒤에도, 질서의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충분한 조치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결코 안전도 자유도 없을 것이다. 오직 살육이 다시 시작되기 전까지의 일시적 공백만 있을 뿐이다.

    이 점을 인식하면 우크라이나 평화의 핵심 문제로 들어가게 된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지배하거나, 더 나아가 주권 국가로서의 우크라이나 자체를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지배도, 소멸도 거부한다. 푸틴은 오래 전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는 전쟁의 근본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 한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최근 알래스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그는 같은 논지를 반복했다. 그 말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은, 전쟁의 근본 원인이 다름 아닌 푸틴 자신이라는 점이다.

    오늘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8월 19일 하르키우를 방문한 보리스 구지약 대주교가 애절하게 묘사한 무고한 이들의 학살은 “조 바이든의 어리석은 전쟁”이 아니라 푸틴의 제국주의적 전쟁이다. 참된 평화가 우크라이나 안에,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위하여 정착되려면 이 근본적 사실이 인정되고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919–20년 베르사유에서 꾸며진 그 불안정한 ‘휴전’보다도 더 취약한 정전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질서의 평화’를 건설한다는 것은 단순히 전투를 멈추게 하는 합의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아우구스티노적 의미의 평화는, 미래의 러시아 침공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안보 구조를 필요로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유럽 국가들의 책임이며, 특히 푸틴이 주권국가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키거나 제거하는 데 성공할 경우 다음 차례가 될 나라들의 책임이다. 미국의 지원 역시 필수적이다. 그 지원의 구체적 형태는 논의될 수 있지만, 이제는 논의의 장에서 친푸틴 옹호자들이나 신(新)고립주의자들을 배제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안보만이 우크라이나가 받아야 할 전부는 아니다. 알래스카와 워싱턴 정상회담을 둘러싼 담론 속에서―게다가 알래스카 오찬 메뉴에 정말로 “전범을 기리는” 식사라는 문구까지 넣어야 했는가―나는 지난 3년간 러시아가 피 흘리는 그 나라의 사회기반시설에 입힌 파괴에 대한 재건 문제를 거의 듣지 못했다.

    세계은행은 올해 2월, 그러한 재건에 앞으로 10년간 5,240억 달러가 소요될 것이라고 추산하였다. 현재 유럽에는 약 3천억 달러 규모의 러시아 외환 보유액이 동결되어 있다. 그 자금이 평화 협상에서 논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진정으로 기교적이면서도 정의로운 합의는, 적어도 그 자금들을 재건에 투입하는 것일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8-27 22:33]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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