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플로리다 팜비치 경찰은 제프리 엡스타인이라는 부유한 남성이 열네 살 소녀를 성적으로 학대했는지 여부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소녀를 면담했을 때, 그녀는 엡스타인이 자신에게 돈을 주고 마사지를 하게 한 뒤 자기 앞에서 자위했다고 증언했다. 곧이어 경찰은 놀랍도록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다른 열두 명의 소녀들을 찾아냈다.
소녀들의 증언은 일관되었고, 동시에 중요한 점에서 동일하게 부재했다. 그 누구도 자신이 다른 남성들에게 인신매매 당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당시 플로리다에서 기소를 주도했던 검사 마리 빌라파냐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가 만난 피해자들 가운데, 다른 남성들이 학대에 가담했다는 말을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가해자는 오직 제프리 엡스타인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엡스타인이 세계의 권력자들을 협박하기 위해,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연계된 아동 성범죄 ‘블랙메일’ 조직을 운영했다고 믿는다. 거의 모든 이견이 갈리는 평론가들도 이 점에서는 합치한다. 만일 그런 조직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것은 2005년—그의 몰락 직전까지—활발히 작동하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팜비치의 피해자들 가운데, 블랙메일 조직에 대한 어떤 지식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후의 세월 동안에도 신뢰할 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엡스타인의 오랜 동료 기슬레인 맥스웰은 2021년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녀가 기소한 대상은 단 한 사람, 제프리 엡스타인뿐이었다. 그렇다면 ‘엡스타인이 블랙메일 조직을 운영했다’는 발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물로서의 엡스타인’과 ‘신화로서의 엡스타인’을 구분해야 한다.
엡스타인이 협박을 위해 인신매매를 했다는 관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퍼뜨린 이는 버지니아 주프레였다. 그녀는 2015년 선서진술서에서 엡스타인이 자신을 영국 왕실의 앤드루 왕자, 변호사 앨런 더쇼비츠를 포함한 “다른 권력자들에게 성적 목적으로”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녀에 따르면 엡스타인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기 주머니 속에 넣어두려” 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일이 이스라엘 정보기관을 위해서였다고도 시사했다. 그러나 평생 이스라엘을 옹호해온 더쇼비츠 같은 인물을 왜 모사드가 협박해야 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더쇼비츠의 법적 대응에 직면하자, 주프레는 자신이 “그를 지목하는 데 있어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물러섰다.
주프레는 과거에도 신빙성을 입증하지 못한 주장을 한 이력이 있었다. 1998년, 열네 살이던 그녀는 두 명의 지인(열여덟, 열일곱)이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증언했으나, 몇 달간의 조사 끝에 검찰은 “피해자의 신빙성 부족과 재판에서 유죄 입증 가능성 희박”을 이유로 기소를 포기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녀의 회고록에서는 빠져 있다. 대신, 론 에핑거라는 남자에게 리무진으로 납치되었다가 FBI 요원들에 의해 구출되었다는 이야기를 실었다. 그러나 FBI 기록에는 이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2025년 3월 30일, 주프레가 스스로 생을 마치기 직전, 그녀는 16년 경력의 버스 운전사가 시속 110km로 자신을 들이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멍든 눈 사진을 올리며 “그들이 내게 4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내 아기들을 마지막으로 보기 전까지는 떠날 수 없다”라고 썼다. 그러나 운전사는 버스가 구조상 시속 100km 이상 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 발언은 사실상 자녀와 연락을 시도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사라 랜솜이라는 또 다른 고발자는 2016년 뉴욕 포스트 기자에게 도널드 트럼프와 빌 클린턴 등이 찍힌 성적 동영상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러시아와 해커 집단 ‘어나니머스’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후일 뉴요커 인터뷰에서는 테이프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라고 시인했다.
엡스타인이 블랙메일 조직과 연계됐다는 가장 ‘중량감 있는’ 증거로 여겨지는 것은 2019년 데일리 비스트 보도였다. 익명 소식통이 “엡스타인은 정보기관과 관련이 있어서 가벼운 형을 받았다”고 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당 보도의 근거는 희박했고, 담당 기자 비키 워드 역시 사실을 느슨하게 다루는 습관으로 비판받아왔다. 무엇보다도 당시 연방검사였던 알렉스 아코스타는 선서 하에 이 주장을 부인했다.
미 법무부 감찰국의 공식 보고서는 아코스타가 오히려 주 검찰의 무성의한 태도 속에서 피해자 보상을 이끌고, 성범죄자 등록과 실형을 관철시킨 인물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주 검찰은 엡스타인에게 집행유예, 성범죄자 등록 면제, 피해자 보상 면제라는 ‘황당한 합의안’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엡스타인 측은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며 이를 거절했을 정도였다.
엡스타인이 블랙메일 조직을 운영했다는 주장은 사실보다 오래된 음모론 전통에서 기원한다. 여기에는 ‘Q애넌’, 중세의 피의 모독(blood libel), 그리고 시온 장로들의 의정서가 얽혀 있다.
이 신화의 핵심은, 국제적 음모, 특히 유대인들이 무고한 이들의 순결을 파괴하고 협박을 통해 권세를 확장한다는 발상이다. 이는 아동 성학대를 ‘유대인의 전형적 범죄’이자 ‘의례적 살인’으로 묘사하는 오래된 전형을 되살린 것이다.
12세기 노리치의 윌리엄 사건, 1840년 다마스쿠스 사건 등은 이러한 허위 고발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는지 보여준다. 근대적 자유주의가 확산된 19세기조차 언론의 선정주의와 정치인의 선동 속에서 유대인들은 보호막을 잃고 희생양이 되었다. 오늘날 SNS 시대에도 검열 완화는 진리의 증언뿐 아니라 거짓의 확산도 가능케 한다.
특히 ‘엡스타인 신화’는 의정서의 주장을 현대적으로 변형한다.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세습적 기반이 없어 매수와 협박에 취약하다는 전제, 그리고 유대인이 이를 이용한다는 모티브가 그대로 반복된다. 다만 이번에는 ‘세계 유대인’ 대신 ‘유대 국가(이스라엘)’가 대리인으로 등장한다.
분명한 사실은 이렇다. 엡스타인은 미성년자를 상대로 중대한 성범죄를 저질렀다. 그는 더 엄중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신화’다. 그 신화는 음모론의 혼합체—사탄적 광기, 피의 모독, 의정서, UFO—이며, 겉으로는 점잖은 형식을 띠지만 결국 유대인에 대한 악마화를 향한다.
엡스타인 신화가 널리 수용되는 것은 정치 체제에 대한 불신을 반영한다. 그 불신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미국 외교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유대 음모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엘리트들을 규탄하기 위해 소아성애 카르텔을 상상할 필요도 없다.
미국인은 국제 음모의 희생양이 아니다. 그들이 선택한 지도자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들에게 있으며, 더 나은 지도자를 뽑을 힘 또한 자신들에게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