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18] 그는 손에 마이크를 쥔 채 죽었다
  • 로버트 배런 is bishop of the Diocese of Winona-Rochester and the founder of Word on Fire Catholic Ministries. 주교, 미네소타 위노나-로체스터 교구장

  • 찰리 커크의 피살이 이토록 강력하게 문화 전반에 파문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의 한창 나이에 잔혹하게 생명이 끊어진 까닭일까요? 어린 두 자녀와 아내를 남겨두고 떠난 까닭일까요? 누구도 그런 방식으로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일까요? 물론 이 모든 이유가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이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손에 쥔 것이 총이나 칼, 수류탄이 아니라 ‘마이크’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찰리 커크가 택한 방식은, 미국 전역의 대학 캠퍼스를 다니며 자신과 견해가 다른 이들을 공개 대화로 초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유튜브에는 그의 활동을 담은 수천 개의 영상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운 질문을 피하지 않았고, 상대의 의견과 급진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을 개진할 때조차 상대를 존중하며 대화했습니다. 몇 달 전, 제가 그에게 짧은 축하 문자를 보낸 적이 있는데, 이는 수많은 ‘각성(woke)’ 대학생들이 무례하게 몰아붙이는 상황을 그는 은총과 미소로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그는 서구 문명의 기초를 이룬 고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입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거리에서 소크라테스는 설교가 아닌 ‘대화’를 통해 젊은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비판하며, 상대가 입장을 더 명확히 하도록 요구하고, 자신이 간과한 점을 인정했습니다.

    제자 플라톤은 이런 대화를 문학적으로 재현한 ‘대화편’을 남겼고,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걸으며 의견을 나누는 ‘페리파토스(산책 학파)’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훗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전통, 즉 정규 강의보다는 교수와 학생의 일대일 문답 속에서 이루어진 ‘참 학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서구 문명의 또 다른 기초는 예루살렘입니다. 유대교 안에서는 성경과 탈무드를 두고 두 학생이 격렬하게 토론하며 배우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세기를 거쳐온 랍비와 학자들의 견해를 함께 참조합니다.

    기독교적 버전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문 안에서 구현되었습니다. 중세 대학에서 학문은 주로 ‘quaestiones disputatae(논쟁 문제)’라는 공적 토론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아퀴나스 같은 대가가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의 해석을 제시하면, 수십 혹은 수백 개의 반론이 제기되었고, 그는 하나하나에 응답했습니다.

    오늘날 그의 저술이 건조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이 활발하고 때로는 거친 논쟁의 문학적 재현물입니다. 이런 ‘대화적 진리 탐구’ 전통은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어, 대화·토론·표현의 자유를 토대로 한 정치 체제를 세우게 했습니다.

    이 대화적 방식에는 두 가지 기본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진리의 객관성입니다. 첫째, 인간 존엄을 믿지 않는다면, 상대를 설득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를 억압하거나 제거하는 것입니다. 제 부모 세대와 제 세대가 경험한 전체주의—히틀러, 모택동, 스탈린, 폴 포트, 카스트로—가 그 예입니다. 그들은 대화하지 않고, 투옥하고, 고문하며,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존엄을 믿는다면, 무기가 아닌 ‘말’을, 위협이 아닌 ‘논증’을 사용하게 됩니다.

    둘째, 세계에는 합리적 구조가 있으며, 따라서 상대와 공유할 수 있는 인식적·도덕적 객관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만일 공통 규칙이 없다면, 토론은 결국 고성 싸움으로 끝납니다. 마치 야구 규칙을 모른 채 경기를 시도하는 아이들이 결국 싸움으로 번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두 전제는 더 근본적인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존재’입니다. 왜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믿는가? 토머스 제퍼슨이 알았듯, “모든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창조주를 제거하면 이 논리는 붕괴합니다. 우리는 인간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믿기에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왜 우리는 세계의 합리성과 도덕적 가치의 객관성을 믿는가? 그것은 창조주 하느님이 세상의 질서와 도덕적 규범을 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는 진리와 선을 가늠하는 초월적 규범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앙이 쇠퇴하면 어떻게 될까요? 문명적 대화의 조건 자체가 무너집니다. 오늘날 찰리 커크의 죽음을 기뻐하는 수많은 영상들이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인터넷의 변두리 괴짜들이 아니라 교사, 교수, 전문가, 의료인, 심지어 공직자들에게서도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상대의 의견과 극렬히 다르다 해도 그의 살해를 축하한다면, 이미 인간 존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것입니다. 특히 ‘각성 이데올로기’에 젖은 젊은 세대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객관적 규범이 사라지고 억압자와 피억압자 간의 권력 다툼만 있다고 믿습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의 34%가 ‘폭력으로 학내 발언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는 공통 의미 체계를 완전히 포기했을 때만 가능한 사고입니다. 대화가 무의미하다면, 폭탄과 총탄이 불가피해집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이탈 현상의 증가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며, 십계명을 배우지 않고, 예언자들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외침을 듣지 않으며, 산상수훈을 접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형제애와 객관적 도덕 질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집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2006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하신 유명한 연설을 떠올립니다. 언론이 주목한 이슬람 언급을 제쳐두고, 핵심은 바로 ‘로고스(이성)’를 의지보다 우선시한 기독교의 특징이었습니다. 말씀이신 로고스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교회는 이성을 존중하는 모든 학문, 철학, 문화와 자신 있게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성보다 의지를 앞세우면 대화는 억압과 폭력으로 전락합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는 바로 이 ‘의지주의(voluntarism)’에 깊이 물들어 있으며, 그 결과는 교황이 예견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다시 찰리 커크로 돌아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크라테스로부터 이어온, 서구 문명을 가장 빛나게 한 ‘대화의 전통’ 속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죽음 앞에서 더욱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우리 문명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으며, 썩은 문화적 영향력이 제도와 젊은이들의 정신 속에 침투했음을 직감하기 때문입니다. 제 진실한 희망과 기도는, 총이 아니라 ‘소통의 도구’를 손에 쥐고 죽음을 맞은 이 용기 있고 신앙적인 사람에게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9-16 06:51]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 다른기사보기 리베르타임즈 기자의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