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20] 정물화, 여전히 성스러움
  • 안드레아스 롬바르트 Andreas Lombard is a German freelance writer and former editor in chief of CATO, the leading conservative magazine in Germany. 독일 CATO 前 편집장

  •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인체 위에 옷자락이 어떻게 주름지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마니키니(manichini)라 불리는 실물 크기의 나무 인형을 사용하곤 했다.

    어느 날, 현대 독일의 한 화가가 라이프치히에서 이 인형 머리에 푸른 천을 씌웠다. 그의 개가 테니스공을 가지고 놀다가 그것을 인형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화가는 황토색, 흰색, 푸른색, 그리고 테니스공의 밝은 황록색이 이루는 색채 조화를 마음에 들어 하였고, 그 장면을 ‘Mater’라는 제목의 정물화로 그렸다.

    눈 없는 어머니의 젖가슴은 매달린 테니스공으로 표현되었고, 그녀의 입은 종잇조각 위에 그려졌다. 그녀는 관람객에게 자신의 아기 그림을 내밀고 있다. 그러나 ‘Mater’는 차갑고 생기 없는 모습, 모성 없는 마돈나였다.

    화가의 이름은 미하엘 트리겔이다. 그는 1968년, 소비에트 점령하의 독일에서 태어났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야 그는 세속 예술 옆에 경건한 차원을 지닌 예술 또한 존재한다는, 일종의 “구원적” 발견을 하게 되었다.

    ‘Mater’의 배경에 놓인 녹색 브로케이드 천은 얀 반 에이크나 조반니 벨리니의 마돈나를 떠올리게 한다. 한 전시회에서 한 10살 소년이 트리겔에게 “왜 성모 마리아를 저렇게 그렸나요?”라고 물었다. 트리겔은 “왜 그것이 마리아라고 생각하니? 어차피 단순한 정물화일 뿐인데”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답했다. “마리아는 항상 그렇게 그려지니까요.” 작품의 차가움 속에서도 그는 하느님의 어머니의 지속적 현존을 보았던 것이다.

    이 작품은 성인들에게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이들은 불경이라 보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을 얼굴 없는 경직된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읽었다. 그러나 트리겔은 자신이 그런 의미를 담아 그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소년과의 경험은 로마를 처음 방문했을 때만큼이나 깊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예수회 본당 ‘일 제수 성당’의 주제단 앞에서 감격에 무릎 꿇을 뻔했는데, 그것은 그가 2014년에 가톨릭으로 세례받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오늘날 트리겔은 우리 시대 가장 두드러진 그리스도교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고전적 ‘pictor doctus(학식 있는 화가)’의 자의식을 지니고, 당당하게 유럽 회화의 고전, 구대가, 매너리즘, 신화적 전통 안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그는 수많은 교회 의뢰를 완수했으며,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초상화를 두 차례 그렸다.

    양식적으로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구상 회화, 뛰어난 기교로 유명한 라이프치히 학파에 속한다. 그는 일찍부터 독일민주공화국의 정신에 내적 저항을 느꼈다. 동독에서는 그리스도교-인문주의 전통이 금기시되었기에, 트리겔의 손에서 그 전통이 예술적으로 부활한 것은 낯설면서도 신선하고 매혹적인 사건이었다.

    트리겔은 라이프치히 시각예술대학에서 시간 소모적이고 세밀한 화법을 배웠다. 먼저 화면을 정교하게 밑칠하고, 구도를 스케치한 뒤, 세밀한 그리사유(grisaille) 톤으로 부분을 점진적으로 완성한다. 수많은 유약(glaze)이 화면에 빛나는 효과를 낳는다. 그의 작품에는 더 말할 것들이 많다. 혁명적인 수태고지(2008), 압도적인 숨은 하느님(Deus absconditus, 2013), 이상(Ideal 2014), 르네상스 (Renaissance 2015), 그리고 에메랄드 석판 (Tabula Smaragdina 2023–24) 등이 있다. 독자들에게 이를 찾아 묵상해 보기를 권한다.

    2020년, 그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2018)으로 지정된 나움부르크 대성당 서쪽 성가대 석의 제대 삼면화 중앙 패널을 새로 그리라는 의뢰를 받았다. 원래 중앙 패널은 루카스 크라나흐가 1517~1519년에 그린 작품이었으나, 1541년 종교개혁 시기에 파괴되었다. 트리겔의 새 작품은 크라나흐의 양쪽 패널 사이에 겸손하면서도 능숙하게 어울렸고, 호평을 받았다. 프로테스탄트 본당에도 이는 예술적, 전례적 성과였다.

    그러나 유네스코는 이 삼면화가 13세기 시성당 기증자상들의 시야를 가린다며, 제대를 성당의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요구했고, 그렇지 않으면 세계유산 지정을 철회하겠다고 위협했다.

    제대를 옮기는 것은 곧 성별해제(축성의 파기)를 의미한다. 더구나 기증자상들은 본래 제대를 둘러싸도록 제작된 것이라, 제대가 없으면 그 자체의 의미를 상실한다. 이 오랜 분쟁은, 자신들의 세속적 세계관을 건물의 역사적·형이상학적 정신보다 우위에 두는 유럽 미술사학자와 복원가들의 권력 다툼을 드러낸다.

    최근 발표에 따르면, 이 제대화는 11월부터 2년간 로마 캄포 산토 테우토니코 성당에 전시될 예정이다. 그동안 작품을 나움부르크로 되돌릴 방안이 모색될 것이다. 분쟁은 계속되겠지만, 그것이 미하엘 트리겔이라는 ‘자연의 힘’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그의 작품은 세 가지를 증언한다. 첫째, 예술에서 한때 가능했던 것은 언제나 다시 가능하다. 둘째, 고전 회화는 그것이 실제로 행해질 때 언제나 동시대적이 된다. 셋째, 공적 삶은 쇠퇴의 길만 걷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서든 초월성을 발견할 수 있다—심지어 눈 없는 마네킹의 얼굴에서도.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9-18 07:34]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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