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애리조나 피닉스에서는 수많은 목회자, 언론인, 정치인들이 모여 고(故) 찰리 커크를 기념하였다. 스테이트팜 스타디움은 7만 명의 인파로 가득 찼고, 수천 명이 주변 거리에 넘쳐흘렀다.
이는 한 개인을 위한 추모식으로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추모식이 아니었다. 5시간에 가까운 이 장엄한 예식은 미국이 21세기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20세기 후반을 직접 살아온 필자에게 가장 놀라웠던 점은 연단에서 여러 차례 울려 퍼진 솔직하고, 진솔하며, 강력한 그리스도교적 증언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는 당연했다. 찰리 커크는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이었고, 공적 자리에서 자주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동료들과 목회자가 그리스도의 현존을 강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었다. 국무장관은 연설을 마치며 니케아 신경을 길게 낭송했다. 국방장관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시다”라고 선언했다. 부통령은 “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심을 드러내 주었다”고 말했다. 포드 대통령이나 사이러스 밴스, 혹은 딕 체니나 럼즈펠드 같은 인물들이 이런 노골적인 신앙고백을 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신앙의 표명만큼이나 애국적 열정도 두드러졌고, 종종 서로 어우러졌다. 군중은 기독교 음악가 크리스 톰린의 무대를 앞두고 “U.S.A.! U.S.A.!”를 연호했고, 그는 요한 복음 1장을 봉독한 뒤 〈주 하나님 크신 이름〉을 불렀다. 당파적 메시지도 곁들여졌는데, 이는 커크의 정치적 역할을 생각하면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일부 친구들은 애국심, 정치, 신앙이 뒤섞이는 것을 우려하였다. 그들의 염려를 이해한다. 하느님의 권위가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원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반응은 달랐다. ‘퍼스트 씽스’의 창립자 리처드 존 뉴하우스 신부는 언제나 종교가 공적 삶에 영향을 주고, 그것을 고양하며, 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가 실제 공적 토론과 정치적 소용돌이, 시민 생활 속에 현존해야 한다. 종교가 공적 광장에서 다소 ‘어수선’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강의실이나 학술 세미나가 아닌, 실제 사회적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번에 정치 지도자들이 담대히 신앙을 고백한 것에 감사한다. 이제 우리는 신앙이 공적 광장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지, 그리스도교적 전통을 지닌 나라가 어떻게 종교적 다원성을 존중하면서도 신앙의 본질을 희석하지 않을지, 애국심을 어떻게 하느님 사랑에 종속시킬지 등을 숙고해 나갈 수 있다.
사실 정치적 목적과 결합한 노골적인 그리스도 고백은 미국의 정치 전통 속에서도 낯선 일만은 아니다. 예컨대, 찰스턴 교회 총격으로 순교한 클레멘타 핀크니 목사 추모식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성경 인용과 신학적 언어가 풍부한 ‘설교-연설’을 한 바 있다. 내용은 신학적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적으로 편향적이었다.
필자는 그때 그 추도사에 대해 비판도 했지만, 오바마가 그리스도교적 언어를 사용한 것을 환영했다. 뉴하우스 신부와 마찬가지로 필자는 종교가 공적 광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잘못 사용되었더라도 성경 말씀으로 책망받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배제된 세속적 도덕주의로 꾸짖음 받는 것보다 낫다. 오바마와 필자는 성 바오로의 말씀 해석을 놓고 논쟁할 수 있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신앙을 심화시키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에리카 커크의 추모 연설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시작했다. “남편이 살해당한 바로 그날, 하느님의 사랑이 제게 드러났습니다.” 슬픔보다 감사가 더 컸던 것이다. 그녀는 에페소서 5장에서 성 바오로가 가르친 부부의 상호 보완성과 가장(家長)됨의 진정한 의미를 분명하고 균형 있게 증언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용서라는 영적 영웅주의를 증언하였다. 그녀 뒤에 연단에 선 도널드 트럼프는 “나는 적들을 미워하고, 그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는다”고 고백했지만, 영혼의 본질적 사안에서는 자신이 뒤처졌음을 어느 정도 깨달은 듯 보였다.
필자는 몇 년 전 ‘강한 신들의 귀환’이라는 책을 썼다. 그 안에서 필자는 신앙, 가정, 국기라는 근본적 사랑에 대한 갈망이 다시 고조될 것이라 예견했다. 찰리 커크의 추모식은 이 세 가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헌신적인 남편으로 찬미받았고, 연사들은 젊은이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권고한 그의 목소리를 상기시켰다.
그는 위대한 애국자로 기려졌고, 거의 모든 연사는 그의 본보기를 따르라고 권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은 삶의 북극성으로 강조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회개와 부흥을 촉구했다. 심지어 신앙심으로 유명하지 않은 대통령조차 “미국에 종교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우리는 하느님을 되찾아야 한다!”라고 외쳤다.
신앙, 가정, 국기. 이 셋은 쉽게 혼동되며, 올바른 순서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사랑들은 우리의 마음을 불태우며, 그 불길은 위험할 수 있으나 동시에 우리를 자기 자신 너머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초월의 동력이며, 우리의 삶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 안에서 충만하게 완성된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