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34] 성혁명의 궤도를 수정하기
  • 프란시스 X. 마이어 Francis X. Maier is a senior fellow in Catholic Studies at the Ethics and Public Policy Center and the author of True Confessions: Voices of Faith from a Life in the Church. 윤리와 공공정책센터(EPPC) 가톨릭 연구 선임연구원

  • 존 레논은 예술가였다. 그리고 모든 좋은 예술가들처럼 (필자는 이 표현을 다소 느슨하게 사용하겠지만) 그는 다가올 ‘거대한 무언가’를 미리 감지했다. 그리고 그것을 1968년에 발표된 단 하나의 곡, 「Revolution 9」, 곧 8분 30초 분량의 혼란한 잡음 속에 담아냈다.

    잠시 후 그 이야기를 다시 하기로 하고, 먼저 'Golden oldie(황금기)'의 한 장면을 꺼내보자.

    필자는 1966년 가을 노트르담 대학교에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내가 속한 졸업반(1970년)은 이 학교의 끝에서 두 번째 남학생 전용 학번이었다. 길 건너편에는 성 메리 여대(St. Mary’s College)가 있었는데, 이는 훌륭한 여성 고등교육기관이었다.

    두 학교는 사우스벤드(South Bend)라는 도시를 공유했다. 오늘날 사우스벤드는 중간 규모의 쾌적한 도시지만, 당시에는 희망이 사라지는 곳처럼 느껴졌다. 겨울은 영혼을 짓누르는 듯 끝없이 이어졌고, 노트르담 남학생은 성 메리 여학생을 4:1 비율로 초과했다. 이는 신입생들에게 이성교제를 사실상 포기하고, 몇 달 동안 인디애나의 긴 어둠 속 북극 같은 절망을 견뎌야 한다는 의미였다. 봄의 ‘풍요’가 다가오면 종족적(?) 결과들이 나타나곤 했다.

    1967년 4월 16일, 1,500명의 노트르담 학생들이 성 메리 여대에 ‘팬티 습격 사건’을 벌였다. “우린 팬티를 원한다!” “Go Irish!”라는 외침과 함께 브래지어 약탈자들이 캠퍼스를 가로질렀고, 여학생들은 기숙사 창문에서 속옷을 던졌다. 성 메리 대학 여학생 한 명이 누군가에게 왜 자신의 팬티를 원하는지 물었다. 대답은 “이런, 거기 있으니까!” 사우스벤드 경찰은 사이렌을 울리며 형식적으로 개입했지만, 실제로는 소동을 묵인했다.

    이 모든 사건은 무해했다. 오늘날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재미’였다. 필자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미래의 아내, 훗날 네 자녀의 어머니이자 평생을 가톨릭 교육자로 살아간 사람이, 바로 그날 성 십자가 홀 창문에서 즐겁게 속옷을 던졌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를 하면 보통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 첫째는 젠더(성평등) 경찰로부터 듣게 되는 ‘성차별적 행위’에 대한 설교이다. 둘째는 더 흥미로운데, 오늘날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어리둥절하거나 지루하거나 불편한 표정이다. “왜 습격을?” “왜 그런 극적 행위를?” “왜 그렇게 힘들게 성을 추구했지?”

    그들의 질문은 합리적이다. 젊은 세대에게 과거는 낯선 대륙과 같다. 나이 들수록 향수는 자연스럽게 생기지만, 그것은 때로 비참하고 위험하다. 1960년대 중반은 결코 ‘좋은 옛 시절’이 아니었다. 베트남 전쟁, 인권운동, 성별 간의 긴장 등 고유의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이후 만들어낸 가파른 사회적 경사로에 오르기 직전의, 비교적 ‘정상적’이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그때로 되돌아가 역사를 다시 쓰고 싶다는 유혹이 생긴다.

    그러나 나쁜 소식은 이렇다. 현실에서 ‘되감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다. 궤도 수정은 가능하다.

    네이선얼 블레이크(Nathanael Blake)는 저서 『혁명의 희생자들』에서 두 가지 중요한 일을 수행한다. 첫째, 그는 20세기 후반 성혁명이 수백만 명을 ‘침대 안팎에서’ 불행으로 내몬 과정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둘째, 그는 희망의 근거를 가진 앞으로의 길을 제시한다.

    이 책은 단순하지만 탁월하다. 간결하고, 생생하며, 논리적으로 정연하다. 탄탄한 연구와 상식에 기초한 주장은, 오늘날의 문화적 혼란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블레이크는 성혁명이 억압적인 성적 태도와 허위의 도덕적 체면을 벗겨내려 했으나, 오히려 위선과 잔혹성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그의 논지는 분명하다. ‘해방된 성’은 오히려 인간의 깊은 의미와 기쁨을 주는 관계를 파괴한다. 참된 관계는 깊은 서약(언약)을 필요로 하지만, 성혁명은 모든 관계—따라서 부모-자녀 관계까지—언제든 끊어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성혁명은 제자들을 이중으로 속였다. 즉각적 쾌락의 추구는 지속적이고 충만한 사랑을 위한 헌신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약속했던 성적 만족도 채워주지 못했다.

    지속적이고 성사적 차원의 혼인 사랑은 우아함과 기쁨, 인내와 풍요로움을 낳는다. 그것은 자기 증여와 절제에 기초한다. 그러나 다수의 상대와 연속적 성적 쾌락만 추구하는 문화는 이를 파괴한다. 역설적으로, 혼인한 부부, 특히 신앙생활을 성실히 하는 부부가 가장 높은 성적 만족을 누린다. 반면, ‘해방되었다’는 많은 청년들은 실제로는 분노, 우울, 도덕적 혼란, 음란물 중독, 그리고 이전 세대보다 현저히 줄어든 성적 관계에 시달린다.

    블레이크는 또한 “폭력은 성혁명 안에 내재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분명한 예가 바로 낙태이다. 여성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한다는 미명 아래 생명을 죽이는 폭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성혁명이 결국 성별 무질서(gender anarchy)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육체의 자유를 노래하던 찬가는 이제 육체의 의미와 존엄을 파괴하는 공격으로 변질되었다.

    블레이크의 말에 따르면 “육체를 제멋대로 빚을 수 있는 점토처럼 다루는 것은, 성혁명이 육체의 내재적 의미를 박탈하고 주관적 주장만 남긴 결과다.” 동성애·트랜스젠더 운동은 ‘자살 위협’을 과장된 감정적 협박으로 삼아 비판을 침묵시키려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비관론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 안에서 새롭게 깨어나는 그리스도교적 리얼리즘을 촉구한다. 성혁명의 압도적 지배가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성 윤리를 보호적이고 자비로운 것으로 다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욕망의 폭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性)을 자기 증여적 사랑의 행위로 이해하는 교회의 가르침은 그 참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블레이크가 강조하듯, 세상은 실패를 거듭하지만, 그 실패는 오히려 미래 복음화의 거름이 된다. 하지만 파종하고 거두는 일은 바로 우리 신자들의 몫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0-02 07:35]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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