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의 국립문서보관소 로툰다 홀에는 미국의 독립선언서, 헌법, 그리고 그 헌법의 첫 열 개 수정조항인 권리장전(Bill of Rights)의 원본이 상설 전시되어 있다. 2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색이 바래고 닳았음에도, 이 양피지 문서들은 여전히 경이로움과 경건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서로 다른 경험과 감수성, 정치적 신념, 종교적 확신을 지닌 사람들이 어떻게 격동의 역사 속에서 협력하여, 1776년에는 자유를 선포하는 장엄한 선언을, 그리고 11년 뒤에는 수많은 도전과 분열 속에서도 여전히 3억 4천만 명의 국민을 이끌고 있는 민주 공화국의 통치 체계를 세울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일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기적이다.
이 점은 9월 17일부터 10월 1일까지 특별히 강화된 전시를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이번 전시에는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역사적 문서 외에도, 평소에는 공개되지 않던 ‘헌법의 다섯 번째 페이지’—즉, 헌법 초안을 비준하고 시행하는 절차에 관한 지침서로서 조지 워싱턴이 헌법제정회의 의장 자격으로 서명한 문서—와 함께, 이후 추가된 17개의 헌법 수정 조항의 공식 사본이 함께 전시되었다.
수만 명의 방문객이 이러한 미국 헌정주의의 포괄적 기념 전시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들이 펜실베이니아 애비뉴를 걸어나올 때, 우리 헌법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경외를 품게 되었기를 바란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 방문객들이 귀가 후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의 신간 『법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 법정과 헌법에 대한 성찰(Listening to the Law: Reflections on the Court and Constitution)』을 읽는다면 훨씬 더 깊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을 친구와 이웃에게도 권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배럿 대법관의 책은 여러 계층에서 읽힌다. 먼저, 그것은 가정과 혼인, 그리고 ‘장소의 소명성’(vocation of place)이 한 인간의 공적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묵상하는, 감동적이지만 결코 감상적인 서술이 아니다.
둘째, 이 책은 오늘날 거의 사라진 과목인 ‘시민학(civics)’의 간결하고 명료한 강의다. 그녀는 세계 최초의 성문화된 헌법을 가진 이유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설명하고, 8천 단어도 되지 않는 미국 헌법이 2만 5천 단어를 넘는 독일 헌법보다 왜 더 효과적인지, 연방주의가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으며, 또한 왜 연방제(federalism)가 새로 태어난 미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밝힌다.
셋째, 이 책은 헌법사 교육서이기도 하다. 배럿 대법관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주요 판례들을 독자에게 안내하면서, 당시의 대법관들이 왜 그렇게 판시했는지, 그리고 그 판결이 옳았는지 혹은 잘못되었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넷째, 그녀는 오늘날 대법원의 법철학을 형성하고 있는 ‘원본주의(originalism)’, 즉 헌법 해석을 그 본문에 뿌리내리게 하는 사법철학을 해설한다. 이 원본주의는 복잡한 헌법 해석 문제에 대해 미리 정해진 답을 제공하지 않지만, 텍스트에 대한 충실함을 통해 법의 일관성과 정직성을 지켜낸다.
다섯째, 이 책은 본질적으로 공적 기관의 내밀한 역학에 대한 창이다.
배럿 대법관은 사건이 대법원에 어떻게 회부되고, 재판관들과 서기들이 어떻게 협력하고 논쟁하는지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서로 법 해석에서 깊이 대립하더라도, 성숙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는 대법관들의 사례를 소개한다. 그 대목은 오늘날 미 의회의 유치한 정쟁 문화를 떠올리게 하며, 성숙한 공직자의 품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책의 내용보다도, 그 책 전체를 관통하는 ‘소명으로서의 공직(vocatio publica)’의 정신이다.
배럿 대법관에게 공직은 경력의 단계가 아니라 봉사(Servitium)이며, 부나 명성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책임(Fides et Officium)이다. 그녀는 법관직을 일종의 퍼포먼스나 이념투쟁의 무대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소명(vocation)’이자, 공동선에 대한 헌신이다.
흥미롭게도 필자가 이 책을 읽던 중, 우연히 영화 《그들만의 리그(A League of Their Own)》의 마지막 장면을 보게 되었다. 영화의 절정에서 감독 지미 두건(톰 행크스)은 프로야구의 고단함에 지친 포수 도티 힌슨(지나 데이비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힘들어야 해. 힘들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거야. 쉽다면 누구나 할 수 있겠지. 그 어려움(hardness)이 바로 위대함(greatness)을 만드는 거야.”
이 말은 사법의 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판단하는 일은 어렵다. 그것은 희생(sacrificium)을 요구한다.
배럿 대법관은 그 희생을 이미 기꺼이 감내해 왔다. 그러나, 야구처럼 그 어려움이야말로 위대한 판사와 위대한 공직자를 만드는 법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