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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레오 14세 |
‘이민자 돕기’의 본질을 흐리는 정치적 프레임
한국의 연합뉴스는 '교황 레오 14세의 당부'라는 기사를 통해 “신앙인은 이방인을 환대하라”는 복음적 요청의 내용을 인용 보도했다.
연합뉴스가 얼마나 신앙과 성경에 대해 이해가 깊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연합뉴스는 ‘PC주의(정치적 올바름)’에 경도된 전 세계 좌익 언론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교황의 발언을 곧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민정책과 대조하며, ‘가톨릭 대 트럼프 정부’의 대립 구도로 왜곡하고 있다.
신앙적 윤리를 정치적 무기로 삼는 이 같은 해석은 가톨릭 교회의 보편적 가르침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좌익 언론의 전형적인 행태다.
이주민을 돕는 일은 탈,불법이라는 미국 국경지역의 특수한 상황들을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질서와 정의 안에서 이뤄지는 자비의 실천이어야 한다. 교회는 언제나 “불법과 무질서의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이주 비극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 좌익 언론들은 이런 균형 잡힌 교리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트럼프 행정부를 ‘비인간적’으로 낙인찍는 프레임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 탈북민’에 침묵하는 이중잣대
한국의 현실은 이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민자 인권을 외치며 서방식 인도주의를 자랑하지만, 정작 북한의 폭정을 피해 목숨 걸고 탈출한 탈북 이주민에게는 차가운 무관심과 편견이 일상화 되어 있다.
좌익 시민단체와 언론은 아프리카나 중동 출신 불법 체류자에겐 ‘인권의 상징’을 부여하면서,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온 사람들에겐 “체제 불만자” 혹은 “적응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는 단순한 사회적 냉소가 아니라, 정치적 선택에 따라 사랑의 범위를 달리하는 위선적 자비임에 분명하다.
교황 메시지의 진의 : ‘무분별한 수용’이 아닌 ‘지혜로운 환대’
레오 14세 교황이 강조한 핵심은 “이주민을 차별하지 말라”는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교회가 새로운 선교적 도전에 응답해야 한다는 영적 요청이다.
이주민을 환영한다는 것은 국경을 없애자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형제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복음의 사회적 적용이다.
문제는 언론이 이를 “모든 불법 이민자까지 환영”으로 왜곡해, 국가의 정당한 통제와 신앙인의 양심적 판단을 ‘비인간성’으로 몰아붙인다는 점이다. 교회는 결코 법질서와 공동선을 해치는 무조건적 수용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감상적 방임일 뿐이다.
신앙인의 과제 : 정의와 자비를 함께 세우는 ‘이민 사목’
오늘의 가톨릭 신자는 ‘정치적 이민자 프레임’ 속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전통은 언제나 질서 있는 자비를 강조해왔다. 즉, 사랑은 정의를 무시하지 않고, 정의는 자비를 배제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황의 말을 왜곡하는 언론의 논리는, 복음의 보편성을 좁은 이념의 틀에 가두려는 시도다. 마찬가지로, 탈북민에 대한 좌익 언론의 냉대 역시 그릇된 이념이 인간 존엄을 가리는 전형적인 사례다.
참된 가톨릭적 환대는 불법과 폭력의 구조를 묵인하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함께 세우는 ‘정의로운 사랑’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주민을 돕는 것은 신앙인의 의무이지만, ‘누구를 어떻게 돕는가’를 묻는 것은 양심의 의무다. 좌익 언론의 선동적 프레임이 아니라, 진리와 정의 위에서 이주민 문제를 성찰할 때 교회의 자비는 비로소 빛을 잃지 않는다.
김·성·일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