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의 ‘탈주술화(disenchantment)’, 곧 ‘탈성사화(脫聖事化)’에는 수많은 원인과 형태가 있다.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ács)의 ‘사물화(reification)’ 개념은 그 단면을 보여준다. 산업화된 사회와 관료화된 국가 체계는 인간을 대체 가능한 상품, 즉 인격적 고유 가치를 상실한 도구적 존재로 취급한다. 산업혁명은 노동을 공동체적 의미로부터 분리시켰고, 인간의 노동은 더 이상 ‘소명(vocatio)’으로 이해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산업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편협한 마르크스주의의 오류이다. 좌파 이념들 또한 인간의 사물화를 심화시켰다. 특히 성혁명(sexual revolution)이라 불리는 현대의 진보적 분수령은, 그 어떤 사회경제적 변화보다도 더 깊이 인간을 ‘사물로’ 전락시켰다.
그 대표적 산물이 바로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이다. 이는 성을 상품화하며, 배우들을 소비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건으로 변형시킨다. 이것은 성의 신비(sacramentum carnis)와 인격적 상호증여의 의미를 철저히 제거한 것이다. 요컨대, 포르노그래피는 “육체의 성사성(聖事性)”을 파괴한다.
이어지는 현상은 낙태(abortus)의 ‘진화된 정당화’이다. 낙태는 처음에는 “불가피한 악”으로 간주되다가, 곧 “유감스러운 필요악(regrettable necessity)”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기뻐할 권리(reproductive right)”로 미화되었다. 이러한 윤리적 퇴화는, 성혁명의 논리—즉 “아이들은 성행위의 우연한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세계관—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 결과, 태아의 신비로운 인격성(personhood)은 박탈되었고, 자궁 안의 생명은 ‘불가항력적 물질’로 환원되었다.
같은 논리가 체외수정(IVF)과 대리모 출산(surrogacy)에도 스며 있다. 물론 자녀를 원한다는 욕망은 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들은 “자녀를 낳는다(beget)”는 신비를 “자녀를 제조한다(make)”는 행위로 대체한다. 생명은 더 이상 ‘은총의 선물’이 아니라 ‘주문 제작된 상품’이 된다.
이에 따라 모성(maternity) 역시 변형된다. 난자 기증과 대리모 제도는 여성을 ‘생식 서비스 제공자’ 혹은 ‘생산 기계’로 전락시킨다. 그녀들의 몸은 인격적 친교의 자리가 아니라, 임대 가능한 도구가 된다.
최근 영국이 실험실에서 정자와 난자를 인공적으로 합성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 단계에 이르렀다는 보도는 다가올 시대의 전조이다. 유전자 편집(gene editing), 배아 선별(embryo screening), 그리고 생식 산업의 상업화는 모두 인간 생명의 탈성사화와 사물화를 가속화한다. ‘디자이너 베이비(designer baby)’라는 표현은 이제 단지 은유가 아니라, 현실 가능한 개념이다. 인간은 더 이상 남녀의 성적 결합(sacramentum coniugii)을 통해 신비롭게 잉태되는 존재가 아니라, ‘소비자 주문’에 따라 생산되는 제품(product)이 되고 있다. “인격(persona)”은 “사물(res)”로 전락한 것이다.
이처럼 성의 신비와 생명의 신성함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의 존엄은 상품화되고 계산될 수 있는 수치로 환원된다. 이는 곧 “성사의 파괴, 곧 탈성사화된 인간학”의 전형적 결과이다.
우리 시대의 비인간화 문화의 세 번째 요소는 ‘탈육화(disembodiment)’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이후의 급진적 페미니즘은, 여성의 몸과 생식 기능을 성평등 달성을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로 간주하였다. 그러한 관점은 인간의 몸을 “은총의 수단”이 아닌 “해방의 장애물”로 여긴다.
여기에 기술의 발전이 더해지며, 인간의 육체는 하느님이 부여하신 자연적 목적(teleologia corporis)에서 벗어난 결함(bug) 혹은 수정 가능한 기계적 구조물로 간주된다. 몸은 ‘자기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자, 제거해야 할 굴레로 여겨진다.
하지만 탈육화는 단지 성(sexuality)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 인간의 대부분의 상호작용은 기술에 매개된다. 배달 앱, 차량 호출, 소셜미디어—이 모든 것은 ‘실체적 만남’(real presence)을 점점 불필요하게 만든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육체적, 인격적 만남이 최소화된 시대는 없었다. AI, 챗봇, 로봇의 부상은 이 현상을 더욱 심화시킨다. 이제 인간은 한 번도 ‘타자와의 대면’을 거치지 않고도, 식사를 주문하고, 이동하며, 심지어 ‘연애 대화’조차 할 수 있다. 이 편리함은 거대한 대가를 감춘다.
조지 오웰은 한때 동성애자 시인 스티븐 스펜더를 향해 분노 어린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여덟 달 뒤, 그는 스펜더에게 사과의 편지를 썼다. 스펜더가 궁금해하자 오웰은 이렇게 답했다.
“설령 내가 그를 직접 만났을 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실제로 만난다는 것은, 그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임을 즉시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남은 오웰 자신을 인간화시켰다. 타자를 ‘관념’이 아닌 ‘인격(persona)’으로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적 표현을 빌리자면, ‘살과 살의 만남’은 ‘친교(communio)’의 자리를 연다. 눈을 마주치는 행위는 곧 ‘영혼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며, 상대가 ‘나와 같은 존재’, 곧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세 2,23)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오늘날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육화된 만남’의 문화를 보편적 탈육화로 대체했다. 대화 상대는 더 이상 인격이 아니라, 의견의 총합으로 환원된다. 그 결과 인간은 서로를 ‘이념의 파편’으로 인식하게 되고, 소셜미디어의 공간은 ‘영혼 없는 전쟁터’로 변질된다.
이 현상은 단지 온라인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리모 출산이 가능하다는 전제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신체적 경험이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에 본질적이지 않다는 가정 위에 서 있다. 입양은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 입양은 결핍의 보상(compensatio privationis)으로서 생물학적 부모의 부재를 치유하려는 행위이다. 반면 대리모 제도는 ‘모성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며, 임신을 우연한 과정으로 격하시킨다. 그리하여 몸은 또다시 상품이 된다.
이 맥락에서 트랜스젠더 이념(transgender ideology) 역시 탈육화의 대표적 예다. 그것은 성별이 단지 ‘심리적 정체성’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몸의 성적 차이를 단순한 원료(material)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기술문명이 형성한 인간의 육체 감각에 대한 왜곡된 직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포르노그래피가 등장한다. 앞서 그것이 인간의 성적 신비를 탈성사화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또한 인간을 ‘비육화’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포르노는 육체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육체를 ‘인격적 만남’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킨다. 소비자는 ‘몸 없는 성(無身의 性)’, 즉 위생과 노력, 사랑과 언약, 결혼이라는 모든 수반 요소가 제거된 순수한 욕망의 환영을 소비한다.
역사적으로, 성(sexuality)은 신성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토라는 성적 행위를 ‘정결과 부정’의 문제로 다루며, 코란은 성교 후 반드시 세정(洗淨)을 명한다. 신약성경의 바오로는 창녀와의 결합을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행위”로 묘사했다(1코린 6,15). 이는 곧, 성이 단순한 육체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구성하는 신성한 행위, 하느님의 창조 사역을 가장 가깝게 닮은 공동 창조의 신비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혁명은 성을 놀이와 오락으로 전락시켰을 뿐 아니라, 그 행위가 지닌 ‘성스러움(sacrality)’, 나아가 인간 본성의 거룩함(sanctitas humanae naturae)을 완전히 제거했다.
예컨대, “낙태가 안전하고 합법적이며, 드물게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 본성의 탈성사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낙태를 ‘생식의 권리’로 찬양하며 축하하는 정치적 언어는 명백히 ‘성스러움에 대한 의식적 반역’, 곧 ‘성화에 대한 도전’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급진적 진보주의가 보여주는 ‘죄의 쾌감’, 즉 “죄를 자랑스러워하는 문화(cultura peccati celebrantis)”이다.
죽음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모든 문화는 생명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그 끝에도 ‘거룩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토라의 부정(不淨) 규정은 시신의 처리에까지 적용되었다. 오늘날에도 시신 훼손을 금하는 법은 여전히 ‘모독(desecration)’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현대 서구 사회는 죽음을 신비가 아니라 ‘의료 행위’로 전환하려 하고 있다.
이제 죽음은 말기 질환뿐 아니라 노화, 우울, 심지어 ‘삶의 부담’까지 포괄하는 ‘처리 가능한 문제’로 여겨진다. 이것은 인간의 생애 전체를 기술적 절차로 환원하는 ‘죽음의 성문화’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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