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40] 새로운 인본주의를 향하여 ③
  • 칼 R. 트루먼 Carl R. Trueman is a professor of biblical and religious studies at Grove City College and a fellow at the Ethics and Public Policy Center. 공공정책 센터 연구원

  • 이처럼 인간 본성은 해체되고, 탈성사화되고, 탈육화되었으며, 모독되었다. 그 결과, 오늘의 서구 사회를 지배하는 도덕적 혼돈과 존재의 공허가 생겨났다. 시편 기자의 물음인,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기억하시나이까?”는 원래 하느님 앞에서의 경탄을 표현하는 찬미였으나, 이제 우리의 입에서는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절망의 탄식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모두 “혼돈 속에서 인간학적 안정성을 회복하려는 열망”,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물음에 대한 회복된 답변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다.

    첫째, ‘인간의 폐기’는 기술 발전에 의해 실질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인간 본성의 개념은 이미 우리가 의존하는 기술적 환경과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 기술에 매개되어 있는 한, 인간 본성은 끊임없이 협상되고 수정되는 대상이 된다.

    따라서 단순히 “기술로부터의 도피”를 외칠 수는 없다. 은수자 시몬 스틸리타스(Simon Stylites)가 기둥 위에서 살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 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현대 세계 속에서 인간성을 회복할 길을 찾아야 하며, 비현실적 낭만주의를 다수의 규범으로 삼을 수는 없다.

    둘째,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붕괴된 현실이다. 신앙 교리와 예배의 부재는,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위에 세워진 인간학적 합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모독에 대한 진정한 응답은 “성화(consecratio)”, 즉 하느님께 바쳐진 거룩함의 회복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세속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겸손한 회복자, ‘성화를 다시 말하는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 개념인 ‘자연적 목적(finēs naturales)’과 ‘초자연적 목적(finēs supernaturales)’의 구별은 인간학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화의 길을 여는 단서가 된다. 종교적 신념이 없는 사람들과도, 인간의 자연적 목적—예를 들어 공동선, 정의, 사랑, 생명의 존엄—에서는 일정한 합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식인들 사이에서 다시금 종교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시대의 ‘인류학적 혼돈’에 대한 자각을 증거한다. 비록 그것이 교리적 회심이 아니라 실용적 관심일지라도, 그 자체로 ‘새로운 인본주의(new humanism)’를 향한 문을 연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교 문명’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함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논할 수 있는 시대의 도래를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인간 본성을 부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혼란(confusio)과 전도(轉倒)로 귀결된다는 것을. 오늘날의 세속 사상가들 역시 이제 그 혼란을 보기 시작했다. 따라서 세속 정책의 자기모순과 실패를 드러내는 것은 진정한 ‘인본주의적 연대(humanist alliance)’를 세우는 첫걸음이다.

    예컨대 트랜스젠더 이념은 그 모순의 전형이다. 그것은 성별의 신체적 차이를 부정하며 탈육화를 옹호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자기실현’을 위해서는 몸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몸은 동시에 ‘무의미한 것’이자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 된다. 심리 상태가 정체성을 규정한다면, “나는 늑대다”라고 믿는 남자가 실제 늑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의식은 ‘늑대의 무의식’을 결코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사례처럼, 성전환 수술 후 고통 속에서 안락사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한 이들의 이야기는 진보주의 내부의 모순을 드러낸다.

    진보는 ‘트랜스 이념’과 ‘조력자살’을 모두 지지하지만, 이 두 입장이 만날 때, 그들은 서로를 부정한다. 이는 결국 “죽음의 문화(cultura mortis)” 안에서조차 ‘고통의 원인’이 선택적으로 차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 스포츠에서의 성별 논쟁 또한 중요하다. ‘공정성’의 문제를 통해 트랜스 이념의 심리주의적 근거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리 게인스(Riley Gaines)가 남성 선수와 함께 시상대에 오른 장면은, 수많은 철학적 논쟁보다 더 강렬하게 ‘육화의 진리’를 드러냈다. 그 장면은 “새 인본주의의 성육신적 증거(incarnate testimony)”였다.

    피임약과 성적 자유는 해방을 약속했지만, 결국 인간을 사물로, 상품으로, 욕망의 도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 등장한 메리 해링턴(Mary Harrington), 루이즈 페리(Louise Perry) 같은 세속적 작가들이 이 문제를 신학 없이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성혁명이 인간을 비인간화했다’는 사실을 경험적, 사회학적 증거로 제시한다.

    또한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가 젊은 세대에게 미치는 소셜미디어의 악영향을 지적할 때, 그는 종교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인간 본성은 무한히 변형 가능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처럼,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가 현대 문명의 자기파괴적 경향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을 다시 인간으로 회복시켜야 한다”고 외친다.

    “새로운 인본주의가 반드시 이 땅의 도성(Civitas terrena)에서 실현될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의 반(反)인본주의가 인간 본성의 해체와 탈성사화를 극단까지 몰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이제 그 한계와 파탄을 보고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싸움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자멸하거나, 혹은 인간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는 새로운 합의를 이루게 될 것이다.

    미래의 문화와 정치의 싸움은 좌와 우,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아니라, ‘인본주의자와 반(反)인본주의자’의 싸움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인본주의’를 옹호할 때가 왔다.”  <끝>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0-08 08:28]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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