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필자는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한 지인을 방문하던 중 점심 모임에 초대받았다. 그 자리에 하버드 케네디 행정대학원에 재학 중인 대학원생이 함께 있었다.
1936년에 설립된 이 기관은, 미국의 지도자들이 최신 사회과학 연구에 확고히 기초하여 더 나은 정책 결정을 내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을 향상시키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젊은이는 자신이 속한 시민 공동체에 대한 구체적인 충성심(loyalty)을 표현하지 못했다.
필자는 물었다. “당신은 분명히 다른 나라의 실업자보다 오하이오의 실업자들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는 필자의 질문을 “부족주의(tribalism)”라며 격렬히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 도덕적 의무는 인류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세계주의적 사고방식(cosmopolitan mentality)은 오늘날 엘리트 집단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알렉스 카프(Alex Karp)는 바로 이 현상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 그가 니콜라스 자미스카(Nicholas W. Zamiska)와 함께 집필한 저서 『기술공화국(The Technological Republic): 강한 힘, 부드러운 믿음, 그리고 서구의 미래』에서 카프는 실리콘밸리의 애국심 결여를 강력히 비판한다.
2018년, 구글 직원들은 자사와 미 국방부 간의 계약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결국 몇 달 후 구글 경영진은 불안감에 휩싸여 계약 갱신을 포기했다. 카프는 이러한 사례를 전형적인 현상으로 본다. 거대 기술기업의 경영자와 직원들은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국가 바깥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미국 체제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며 막대한 이윤을 거두지만, 정작 그 나라를 수호할 의지는 없다. 더 나아가, 조국을 수호하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악마화(demonize)하기까지 한다.
카프는 팔란티어(Palantir)의 공동창업자이자 CEO로, 자사는 미 국방부와 정보기관에 기술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유명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기술산업 비판이 일종의 “브랜드 홍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즉, 중독적 SNS로 돈을 벌어들이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팔란티어는 “국가를 섬긴다”는 도덕적 우위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프의 시야는 훨씬 더 넓다.
카프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the Last Man)”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니체에 따르면 근대는 두 가지 불길한 경향을 낳는다.
첫째는 감상적이고 무력한 도덕주의(moralism)이다. 모든 달리기 선수에게 상을 주고, 전통적 고귀함과 탁월함의 개념을 기피하는 심성 말이다.
카프는 이러한 ‘진보적 도덕주의’의 이면에 숨은 허무주의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포용성(inclusivity)”은 경계를 허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판단을 유보하고 “모호함”을 미덕으로 삼게 만든다. 누가 무엇이 고귀하고 훌륭한지를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미소 어린 평등의 가면 아래 서열의 제거와 진리의 상실이 진행된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아무것도 참되게 믿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포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프는 말한다.
“모든 것을 용인하는 태도는 종종 아무것도 믿지 않는 상태를 낳는다.”
그 결과, “모든 차이를 초월한 다문화 사회”라는 장대한 이상은 오히려 도덕적 평면성(moral flatness)을 낳는다. “너의 가치관이 있듯 나의 가치관이 있다.” 이 상대주의는 사회의 재능 있는 이들을 공허하게 만든다. 그들은 존경하거나 섬길 권위를 잃은 채, 단지 생존과 경력의 유지를 위해 살아간다. 일부는 더 교활하게, 진보적 구호를 외치는 것이 사회적 방패이자 출세의 도구임을 깨닫는다.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M) 운동이 절정이던 때, 그러한 위선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욕망과 야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야망이 신앙적 확신과 도덕적 원칙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졌을 뿐이다.
둘째 경향은 유물론적 세계관(materialist worldview)의 승리다. 삶의 목적은 효용의 극대화, 편안함과 안전의 확보로 축소된다. 이런 영향은 영혼의 왜소화(smallness of soul)를 낳는다.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안락을 택하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대신 안정을 선택한다. 대학 강의에서 배우듯 “위대함”은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환상이라 여겨진다.
“최후의 인간”은 매력적이다. 싸울 가치가 없다면, 아무도 싸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 없는 평화, 비인간적 평화이다. 부유함은 약속하지만, 헌신할 고귀한 대상은 없다.
카프의 말처럼 오늘의 기술창업가들은 “온라인 광고, 사진 공유 앱, 음식 배달 제국”을 건설하는 것에 만족하는 영혼 마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영혼의 협소함을 치유하는 해독제는 헌신(commitment)이다. 카프에 따르면 20세기 후반은 국가 정체성에 대한 비이성적 혐오로 특징지어졌다. (필자 역시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나친 민족주의의 폐해를 두려워한 문화지도자들은, 시민적 연대(civic solidarity)라는 전통적 주제를 상상력의 영역에서 지워버렸다. 카프는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이 말한 “공유된 국가 정체성의 악”과,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이 주장한 “애국심은 도덕적으로 위험하다”는 언급을 인용한다. 누스바움은 인류 전체에 대한 충성만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로저 스크러튼(Roger Scruton)은 이러한 태도를 “자기 집을 두려워하는 병(oikophobia)”이라 불렀다. 카프는 우리가 이 병을 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첫걸음은 “국가 정체성에 대한 솔직하고 단호한 대화”이다.
야심 있는 미국인들은 자신이 섬길 수 있는 공동의 과업(collective enterprise)을 가져야 한다. 미국의 잘못을 끝없이 비판하기보다, 우리가 계승하고 수호해야 할 유산(heritage)을 인식하고 증진해야 한다.
카프의 언어는 종종 “혁신(innovation)” 같은 기업용어로 흘러가지만, 그의 깊은 관심은 영적 차원(spiritual dimension)에 있다. 그는 삶의 영웅적 차원(the heroic dimension of life)이 사라지고 있음을 걱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단순한 명령으로 깨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초월적인 것(transcendent), 우리를 넘어선 “더 높은 것들”에 의해 불려 나올 때 움직인다. 그것들은 우리의 충성을 요구하며, 희생과 봉사를 청한다. 그 안에 영웅적 정신(the heroic spirit)이 깃든다.
사람은 자기 이력서를 빛내기 위해 위대한 일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과 헌신의 불길에 이끌려 그 일을 감당한다. 사랑과 헌신의 세 가지 주요 영역은 하느님, 가족, 그리고 조국이다. 카프는 어빙 크리스톨(Irving Kristol)의 말을 인용한다.
“서구는 거의 혼수상태에 빠진 옛 종교적 정통성을 다시 호흡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기술공화국』에서 카프는 하느님에 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결혼과 가정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 역사에서 가장 보편적인 영웅적 행위는 바로 혼인 안의 신실함과 자녀를 위한 희생적 사랑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카프의 초점은 미국 국가의 재건에 있다. 이는 단지 필요할 뿐 아니라, 실현 가능한 과업이기도 하다. 미국인은 연대를 갈망한다. 소비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지만, 그들은 “최후의 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다. 그들은 위대하고 고귀한 소명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지혜롭고 헌신적인 지도자들이 그들의 상상력을 되살린다면, 미국의 강력한 신화적 전통과 상징체계는 그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반론이 들릴 것이다. “민족주의는 외국인 혐오를 조장하고, 과도한 국기 흔들기를 부추기며, 결국 갈등을 낳는다!” 그렇다. 모든 강한 사랑은 길을 잃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독일 시인 횔덜린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의 힘도 자란다.”
카프의 통찰은 옳다. 우리는 사랑이 결핍된 시대에 살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처방도 옳다.
우리가 헌신의 위험을 감수할 때, 비로소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