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넷 캡쳐 - 노동신문 107 |
노동신문의 기사 〈사회주의제도가 꽃피운 아름다운 이야기〉는 겉으로는 “따뜻한 집단주의”와 “사회주의적 사랑”을 노래하지만, 실상은 국가가 개인의 불행을 체제 선전의 도구로 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영예군인 작가’로 등장하는 리명철의 이야기는 국가에 대한 ‘보답’이라는 명분 아래 장애인 복지와 재활의 문제를 체제 충성의 서사로 왜곡한다. 군 복무 중 부상을 입은 그는 국가로부터 ‘보조금’과 ‘보약재’를 받으며 다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지만, 이것이 개인의 권리로서의 복지인지, 아니면 정치적 충성을 전제로 한 시혜인지는 분명치 않다.
“혁명의 꽃을 계속 피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표현은 결국, 인간의 회복을 체제 선전에 복무시키는 문장이다. 재활은 ‘삶의 복원’이 아니라 ‘당의 은덕에 보답하는 의무’로 바뀌었다.
두 번째 사례인 황주 젖소목장 종업원 민철남의 이야기는 ‘집단의 사랑’을 강조하지만, 실상은 사회 전체가 상호 감시와 복종의 관계로 묶인 구조를 드러낸다.
동료들이 “병원에 찾아와 치료대책을 토의했다”는 대목은 개인의 건강 문제까지 조직이 개입하는 전형적인 ‘생활총화형 사회관리’ 방식이다.
이러한 통제적 연대는 개인의 자유로운 사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북한식 집단주의의 단면을 보여준다. ‘감동적인 동료애’가 아니라, 조직이 개인을 전적으로 감시하고 관리하는 체제의 작동 원리다.
마지막으로 소개된 ‘전천군 안전원’의 이야기는 북한 당국이 주민생활의 모든 영역을 ‘보호’의 명목으로 통제하는 현실을 은폐한다. 쓰러진 여성을 “안전부 안전원들이 업고 병원으로 데려갔다”는 서사는, 공포와 감시의 상징인 공안기관을 ‘인민의 수호자’로 재포장하려는 선전이다.
이른바 “10여일간의 돌봄”은 공권력의 인도주의적 이미지 조작이며, 실제 북한의 주민들이 안전기관을 ‘신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 세 가지 사례는 모두 “사회주의 제도의 따뜻한 품”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품’은 자유로운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는 공간이 아니라, 체제에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된 구속의 구조다.
개인의 고통은 “국가의 은덕에 감사하는 감동 서사”로 변환되고, 자발적 창의성은 “보답의 의무”로 재정의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개인의 존엄은 사라지고, ‘인민의 행복’은 오직 ‘수령의 은혜’를 증명하는 소재로만 존재한다.
〈사회주의제도가 꽃피운 아름다운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회복과 연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체제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소유하고 통제하는지를 보여주는 교본이다.
“보답의 마음 안고”라는 말은 자유로운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국가가 강요한 충성의 언어다. 북한의 현실에서 진정한 ‘아름다운 이야기’란, 체제의 은덕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존엄과 자유를 되찾는 이야기일 것이다.
김·도·윤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