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44] 루터와 뉴먼에게서 배우는 교훈
  • 칼 R. 트루먼 Carl R. Trueman is a professor of biblical and religious studies at Grove City College and a fellow at the Ethics and Public Policy Center. 공공정책 센터 연구원

  • 올해 캔터베리와 로마에서 일어난 최근의 사건들은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한 몇 가지 기념일을 더욱 부각시킨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완성되기까지의 교리적 논의를 촉발한 제1차 공의회(325년) 1700주년이 아니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핵심 문헌인 마르틴 루터의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이 출간된 지 500주년, 그리고 존 헨리 뉴먼이 가톨릭교회에 완전히 받아들여진 지 180주년이라는 사실이다. 두 인물이 한자리에 함께한다는 것은 어색한 조합일 수 있지만, 그들은 오늘날의 교회 현실을 보며 같은 이유로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루터와 뉴먼 사이의 차이는 엄청나다. 특히 『노예의지론』의 중심 쟁점인 ‘성경의 명료성’ 문제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대한 동일한 원리를 공유했다. 곧, 그리스도교는 그 본질상 ‘교의적 신앙’이며, ‘신조(dogma)’로 정의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신앙을 실천적 덕목이나 막연한 경건으로 축소하려는 시도—교리 논쟁을 피하고자 한 그의 인문주의적 의도—에 맞서 “단언(assertio)이 없는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뉴먼은 『나의 생애 변증(Apologia Pro Vita Sua)』에서, 자신이 청년 시절의 개신교 신앙에서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면서도 일관되게 붙들었던 핵심은 “그리스도교는 교의적 신앙”이라는 확신이었다고 고백했다.

    이 진리는 오늘날 개신교인과 가톨릭 신자 모두에게 실천적 함의를 지닌다. 곧, 그리스도교 교리는 모든 신앙 실천(개인적이든 제도적이든)보다 선행하며, 그것을 형성한다. 교회와 그 구성원은 결코 자율적 개인이 아니다. 그들은 ‘신앙의 형식’(forma fidei)에 자신을 결속시키는 존재들이다.

    설교, 사목, 직장 내 행동, 혹은 소셜미디어 상의 태도까지—그리스도교의 진리가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규정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기계적으로 세상의 도전에 반응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의 ‘선행된 형상’을 바라봄으로써 어떻게 반응할지를 판단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근의 사건들은 오늘날 교회 지도부가 교의적 확신이 아니라 ‘관리적 실용주의(managerial pragmatism)’에 의해 더 지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추기경 수피치(Cardinal Cupich), 주교 파프로키(Bishop Paprocki), 상원의원 딕 더빈(Sen. Dick Durbin)을 둘러싼 논란에 대응하면서, 레오 교황께서 낙태와 사형제도의 차이를 흐려놓는 발언을 한 것은 매우 우려스럽다.

    개신교인인 필자로서도,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신자 간의 합리적 견해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낙태와 사형은 본질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낙태는 무고한 생명을 의도적으로 살해하는 의술 행위이며, 사형은 유죄에 대한 정의로운 형벌의 집행을 지향한다. 그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떤 목회자도 안타깝지만, 교황이 그러하다면 그것은 충격적인 사건이며, 그의 지성을 고려할 때 발언의 배경을 의심케 한다. 일부 진보적 가톨릭 논객들은 이를 ‘프란치스코 교황 시대의 자유주의적 윤리 노선이 계속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지만, 그 해석이야말로 사태의 본질을 드러낸다.

    한편 캔터베리(Canterbury 영국 성공회 중심지)에서는 30여 년 전 이미 구조적으로 예정되어 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여성 사제 서품을 허용한 순간, 언젠가 여성 대주교가 등장할 것은 불가피했다. 그러므로 이번 인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놀랍지는 않다. 더 슬픈 것은, 새 대주교가 낙태와 LGBTQ+ 문제에서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는 사실이다. 불과 몇 주 전, 보수 복음주의자로 알려졌던 조지 캐리(George Carey) 전 대주교마저 상원에서 안락사 합법화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이제 영국 성공회의 지도자들에게 교의는 더 이상 사고와 언행의 기준이 아니다.

    로마와 캔터베리가 공유하는 병증은 분명하다. 교회 지도직을 ‘진리의 수호’가 아닌 ‘기관 관리의 기술’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영국 성공회의 새 수장은 정통 신앙(orthodoxy)이 아니라, ‘전통주의자들을 주변으로 밀어내어 교회 일체성을 확보할 능력’으로 찬사받고 있다. 복음이 문화적 취향의 함수가 아님을 믿는 이들은 이제 ‘문제적 인물들’로 낙인찍힌다.

    로마 역시 ‘연속성’을 강조하지만, 이번 교황의 발언은 그러한 일관성의 표면 아래 존재하는 혼란을 드러낸다. 그는 라틴 미사 문제에서 전통주의자들에게 한 발 양보하는 듯하다가, 동시에 제임스 마틴 신부를 교황청으로 초대하고 그에게 여론의 주도권을 내준다. 그리고 이제는 미국 주교를 곤경에 빠뜨리는 발언을 하며 교리적 구분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물론, 아직 레오 교황의 즉위 초기이니 ‘상황 파악 중’이라는 선의의 해석도 가능하다. 필자 또한 처음에는 그렇게 이해했다. 그러나 최근의 행보를 보면, 필요한 정화와 갈등을 회피하려는 태도, 그리고 프란치스코 시대의 노선을 좀 더 은밀하게 지속하려는 의도가 그 ‘모호함’의 실질적 동기일지도 모른다. 사실 ‘모호함’이라는 말조차 이제는 지나치게 관대한 표현이 될 것이다. 모호함이 언제나 한쪽 진영에만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모호하지 않다.

    캔터베리에 또다시 어제의 세속 취향을 교회 문화로 세례 주는 인사가 임명된 것만 보아도, 영국 성공회가 정통 대신 세속적 용기를 택하는 전통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루터와 뉴먼은 서로 달랐지만, 둘 다 동일한 진리를 인식했다. 그리스도교는 교의적 헌신 위에 서 있으며, 시대의 요구나 제도 정치에 종속될 수 없다. 세상과 신앙을 절충하거나, 상반된 진영을 ‘겉보기의 일치’로 묶어 이단적 실천을 용인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에 대한 배신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선택은 본래 단순하다. 진리에 대한 충실한 헌신(fidelitas veritatis)과 타협 없는 교의적 정직성, 그것이야말로 신자들이 교회 지도자에게 요구할 최소한의 덕목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0-12 08:21]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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