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45] 바오로는 결코 유대인들을 반대한 적이 없다
  • 제이슨 A. 스테이플스 is an assistant teaching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Philosophy and Religious Studies at North Carolina State University. 철학·종교학 조교수

  • 지난달, 필자의 저서 ‘Paul and the Resurrection of Israel(『바오로와 이스라엘의 부활』)’에 대한 First Things의 두 번째 서평이 실렸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기뻤습니다. 다만 제목이 “바오로는 유대인들을 반대했는가?”(“Paul Against the Jews?”)였기에, 그 글이 오히려 필자의 저서가 바오로가 실제로는 유대인들에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을 설명하는 방향일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글의 저자 제럴드 맥더못(Gerald McDermott)은 정반대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의 서평이 필자의 책에 대한 핵심 논지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어, 신학적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직접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맥더못은 필자의 책이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들을 주도적인 이스라엘인으로 간주했다”고 주장한다고 요약하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할 인용문이나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전반적으로 보이는 문제, 즉 출처 없는 단정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필자의 책의 실제 논지는 정반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다수가 과거 역사 속에서 이방 세계로 흩어져 동화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이 말한 “온 이스라엘의 회복”(the restoration of all Israel)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결합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하나로 회복되는 사건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주류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바오로에게 있어 유대인은 오히려 이스라엘 전체 안에서 우두머리이며 지도적 부분(“the leading portion,” 48쪽)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맥더못은 필자가 고린토 12,2절을 “너희가 전에는 이방인이었을 때”(“when you were former gentiles”)라고 번역했다고 주장하며, “‘former’(전에는)라는 단어는 헬라어 본문에 없는데 스테이플스가 임의로 삽입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책에 제시된 유일한 번역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이방인이었을 때, 말 못하는 우상들에게 이끌려 다녔던 것을 알고 있다.”(331쪽)

    여기서 그는 ‘번역’과 ‘해석적 주장’의 구분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헬라어 원문의 동사가 미완료(imperfect) 시제라는 점에 주목하여, 바오로가 수신자들이 더 이상 ‘이방인들’(ἔθνη, ethnē)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그들은 이전에는 이방인이었으나 이제는 하느님의 백성 안에 편입된 존재들입니다.

    맥더못은 이것을 “번역상의 왜곡”이라 비난하지만, 실제로는 신학적 결론에 대한 이견일 뿐입니다. 그는 대부분의 영어역본이 이 구절을 “너희가 이교도였을 때”(“when you were pagans” 혹은 “heathens”)로 옮긴다고 말하며 이를 근거로 듭니다. 그러나 이는 원문이 말하는 바를 미리 가정한 번역일 뿐입니다.

    만일 바오로가 단순히 “우상 숭배자” 혹은 “불신자”를 뜻하고자 했다면, 그는 충분히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도적으로 “ἔθνη”(ethnē, 이방인)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모든 문맥에서와 동일하게, 여기서도 그것이 ‘민족적 정체성’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고린토 12,2에서 바오로는 “너희가 과거 다른 민족의 일원이었을 때, 그 민족의 신들을 섬겼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폴라 프레드릭슨(Paula Fredriksen)이 말했듯이, “고대 세계에서 신들은 혈통 속에 실재했다”(“gods really did run in the blood”)는 맥락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이제 “이스라엘의 공동체”(에페소 2,12)에 편입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전 민족의 우상들을 더 이상 섬기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경배하게 된 것입니다.

    맥더못은 또 “스테이플스는 신약 시대에 ‘이스라엘인’(Israelite)이 유대인을 지칭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고 하며, 역시 아무 인용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는 명백한 허위입니다.

    필자의 책은 유대인들을 “이스라엘이라는 더 큰 범주 안의 한 하위집단”으로 명시하며(52쪽), 신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전체를 대표하여 그 일부를 지칭할 수도 있다”(48쪽), 따라서 “현대의 유대인들도 이스라엘의 한 부분으로서 ‘이스라엘인’이라 불릴 수 있다”(66쪽)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해석은 마치 “모든 미국인이 플로리다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플로리다 사람을 미국인이라 부를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라는 단순한 비유를 무시한 셈입니다.

    맥더못은 이러한 오해 위에, 신약에서 “이스라엘/이스라엘인”이 유대인을 가리키는 사례를 나열하지만, 그 어떤 본문도 필자의 논지를 반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필자의 모델과 완벽히 양립합니다. 그의 결론—즉 “‘유대인’과 ‘이스라엘인’은 완전히 동의어다”—은 성경 문맥과 어휘적 분석 모두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맥더못은 마지막으로, 필자가 “메시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하느님께 의미가 없다”고 제안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의도적 왜곡입니다.

    그는 로마서 11,28–29을 언급하며 “이 구절(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Nostra Aetate에 영감을 준 구절)이 단 한 줄의 각주에 묻혀 있다”고 비판하지만, 사실 이 구절은 본문의 핵심 인용 블록 전체(320쪽)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필자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현대의 불신실한 이스라엘인들도 그 선택(선민의 소명)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들은 복음에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이다. 이러한 불신실마저도 구속적 목적 안에서 사용되고 있다(로마 9,21–26 참조). 바오로는 하느님의 계약적 약속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성취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곧,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동 구원이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성을 증언한다.”

    따라서 맥더못의 “본문에서 이 구절이 거의 생략되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하느님이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철회했다”거나 “이방인 교회가 유대인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그의 결론 역시 전형적인 대체신학적 오해(supersessionism)에 불과합니다.

    모든 저자는 자신의 글이 오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 필자는 기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다행입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10-13 08:02]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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