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많은 언론들이 ‘교황 레오 14세의 첫 100일’을 평가하는 분석을 쏟아내고 있다. 마치 미국 태생 최초의 교황을 미국 대통령처럼 ‘임기 초 성적표’로 평가할 수 있는 존재인 양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시카고 남부 출신의 로버트 프레보스트(Robert Prevost)는 오히려 미국 연방대법원 후보자상(像)에 더 가깝다. 그는 상당한 업적을 지닌 유능한 법관이지만, 그의 견해에 대해선 명확히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로버트 프레보스트 추기경은 다양한 업적과 경험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페루에서 사도직을 수행한 미국인 선교사 사제였으며, 12년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총원장을 지내며 수십 개국을 여행했다. 그 뒤 10년간 페루 칙라요(Chiclayo)의 주교로 봉직했고, 마지막으로 주교 임명 문제를 담당하는 바티칸의 가장 중요한 부서 중 하나의 장관(prefect)으로 2년간 재임했다.
이후의 직무에서 그는 전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람이었다. 교회 서열 안에서 이런 인물들은 종종 빠르게 부상한다. 그들은 ‘자신을 발탁한 교황의 은총’ 덕분에 권력과 명성을 얻는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St. John Paul the Great)의 은총 아래 성장한 뉴욕의 존 오코너 추기경, 파리의 장 마리 루스티제 추기경, 밀라노의 카를로 마르티니 추기경을 떠올려보라.
2022년 말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선종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층 더 자유로워진 듯했다. 베네딕토 교황이 생존해 있는 동안 프란치스코는 그의 사임을 “용기와 겸손의 행위”로 평가하며, 교황직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찬양했지만, 베네딕토의 장례가 끝난 지 두 달도 안 되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교황직은 종신직이다.” 그는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베네딕토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밝힌 셈이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또한 교황청 인사에도 더 자유롭게 손을 댔다. 그는 2023년에 자신의 두 ‘사람들’을 로마 교황청의 정점에 앉혔다. 즉, 프레보스트를 주교성(prefect of bishops) 장관으로, 그리고 비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를 교리교성(prefect of doctrine)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그해 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따라서 2025년 콘클라베에서 프레보스트와 페르난데스는 모두 프란치스코의 “후계 노선”을 상징하는 유력 후보였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지역별로 뒤엉킨 ‘동성 커플 축복 논란’의 중심 인물로, 입맞춤과 오르가즘에 관한 논란 많은 저작으로 인해 초장부터 후보군에서 제외되었다. 반면 프레보스트는 거의 모든 측에서 받아들여졌고, 첫 번째 투표 후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폭넓은 호소력의 비결은 바로 ‘논란거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부유한 삶을 뒤로하고 페루로 선교를 떠났으며, 수도회 지도자로서 행정 경험을 쌓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임을 얻으면서도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았다.
그가 주교성 장관으로 있을 때, 2023~2024년의 장기 시노드와 동성 커플 축복 논란을 무사히 통과했으나, 자신에 대한 주목을 거의 받지 않았다. 교황청 언론은 그를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그가 페루에서 선교 활동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그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측근들 중에서도 가장 ‘프란치스코스럽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은 새 교황에 관한 두 명의 가톨릭 언론인—한 명은 보수적이고, 다른 한 명은 진보적인—이 각각 급히 출간한 전기적 평전이 마주한 난제를 보여준다.
번슨(Bunson)과 화이트(White)의 책은 모두 얇으며, 둘 다 동일한 한계를 지닌다. 즉, 레오 교황이 논쟁적 주제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려주지 못한다. 교회 행정의 중심부에서 69세까지 주목받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것은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드러내지 않기로 한 선택’일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교회 행정가일 가능성이 높다.
선교사 시절에도 그는 윌라 캐더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막 서부로 나아가던 ‘장 마리 라투르’(Jean-Marie Latour)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지역 관구장, 수련장, 신학교 교수, 교회법 전문가였으며, 동시에 본당 사목도 수행했다. 이후 수도회 총원장과 주교가 된 후에는—많은 상급자들이 그러하듯—‘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면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다변(多辯)과 변덕에 지친 추기경단에게는, 바로 그 신중한 침묵이 가장 매력적인 덕목이었을 것이다.
프레보스트가 처음 페루에 체류한 시기는 1988년부터 1998년까지로, 당시 페루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이 마르크스주의 게릴라조직 ‘빛나는 길(Shining Path)’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두 전기 모두, 프레보스트가 그 격렬한 시대의 정치·사회 문제와 어떻게 관계했는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한 1980년대 페루 교회를 지배하던 ‘해방신학’에 대해 그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번슨은 다만 그가 “양측의 과도함을 모두 비판했다”고 짧게 언급할 뿐이다.
화이트는 자료의 부족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하이라이트 모음집’으로 채우며,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선거(콘클라베)” 장을 넣고, 레오의 생애를 피상적으로 정리했다. 그의 평가는 종종 의심스럽고, 때로는 우스꽝스럽다. 그는 2025년 5월의 콘클라베를 “지난 60년간 가장 중요한 선거”라 부르고, 베네딕토 16세에 대해 “훌륭한 교수였지만, 그의 교실은 비어 있었다”고 평한다—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신학자를 두고 하는 말로서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 또한 그는 프란치스코가 각국 정상에게 파리기후협약 사본을 건넸다는 사실을 감탄하며 서술하지만, 교황이 UN 문서를 나누어주는 것은 ‘지극히 세속적인’ 행동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반면 번슨의 서술은 훨씬 통찰력 있다. 그는 ‘쇠퇴의 증인’이라는 장에서 프레보스트의 초기 생애를 탐구한다. 1955년, 미국 가톨릭 제도의 절정기에 태어난 그는 1953년에 세워진 본당에서 세례를 받고, 어린 시절 매일 새벽 미사에서 복사를 섰다. 그후 14세가 되던 1969년, 그는 신학교 기숙사로 들어갔고, 사제품을 받을 즈음 그 신학교는 폐쇄되었다. 주교로 서품되었을 때는 어린 시절의 본당마저 문을 닫고 말았다.
그의 수도자 삶은 미국 내 수도생활의 급격한 쇠퇴와 함께했다. 사회학적, 문화적 측면에서 그는 미국 가톨릭의 절정기에 태어나, 그 이후 70년간의 하락 곡선을 지켜본 증인이다. 그가 미국으로 귀국하더라도, 세례받던 성당이나 신학교 경당을 다시 찾는 감동적인 장면은 없을 것이다.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선교하는 교회’와 ‘새 복음화’를 강조하지만, 다른 점은 그가 가톨릭 제도의 붕괴를 실제로 경험했다는 것이다. 시카고 교외에서 성장하며 그는 이민 가톨릭이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는지를 보았고, 또한 깊은 신앙적 회심과 복음적 삶이 결여될 때, 그것이 한두 세대 만에 어떻게 무너지는지도 보았다.
모든 교황은 자신의 전기적 경험의 산물, 혹은 그 포로이다. 젊은 시절 요한 바오로 2세는 나치와 공산정권하에서 순교한 사제들의 영웅적 증언에 감화되었고, 베네딕토는 30대에 이미 구아르디니와 발타자르, 성경학자들과 함께 신학 쇄신의 흐름 속에 있었다. 반면 프란치스코는 분열과 쇠퇴, 비효율과 부패로 가득한 아르헨티나 교회 속에서 살아왔으며, 그런 경험은 그의 교황직에 권위주의적 분열의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아르헨티나식 방식’이었다.
레오 교황의 교황직에서 핵심 질문은 그가 두 가지 주요 경험—즉, 고국 교회의 쇠퇴를 목격한 경험과, 페루 선교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느냐이다.
선교사에게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는, 선교지를 ‘결핍된 곳’으로 보고 외부의 도움을 주려는 유형이다. 이런 태도는 문명과 신앙을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둘째는, 전자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선교지로부터 자신이 배워야 한다고 믿는 유형이다. 이 경우 외부의 비판은 ‘무지하거나 부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레오 교황은 어느 쪽일까?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자신의 선교 경험을 해석하는 주요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분명히 페루 국민을 사랑하지만, 그들에게 다른 미래를 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라틴아메리카는 지난 한 세기 동안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두 세대 연속으로 질서, 성장, 낮은 실업과 인플레이션을 유지한 기억이 있는 노인조차 드물다. 이는 가톨릭 대륙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다. 신앙이 전래된 지 5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페루에는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현실이 그 증거다.
프란치스코 교황 재위기의 가장 큰 공백은, 그가 쇠퇴하는 예수회, 쇠퇴하는 자국 교회, 쇠퇴하는 국가를 향해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과연 레오 교황은 다른 진단을 내릴 수 있을까? 더 나은 처방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이는 단순히 교회의 사회교리를 교묘히 적용하는 문제를 넘어선다. 그는 자신의 교황명 ‘레오’를 사회·정치·경제 문제에 대한 가톨릭 사상의 아버지, 레오 13세 교황의 이름에서 따왔다. 따라서 이는 교회 통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리마 대교구는 지금 혼란스럽다. 프란치스코는 2019년, 세속과 교회 정치의 당파적 대립 속에서, 보수적 루이스 시프리아니 추기경을 해임하고, 한때 ‘이단적 사상’으로 가톨릭 신학 강의를 금지당했던 교수 카를로스 구스타보 카스티요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카스티요가 2024년 추기경으로 승진한 뒤, 신학교에서는 재정 및 성추문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프레보스트는 페루 주교이자 로마 주교성 장관으로서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았다. 그는 그 혼란한 교회로부터 무엇을 배웠을까? 카스티요는 이미 정년을 넘겼다. 레오 교황이 리마 교구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그의 교황직이 향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신호가 될 것이다.
첫 여름 동안, 레오 교황은 선출 이후 이어진 ‘선의와 일치의 시간’을 신중히 연장했다. 그는 프란치스코의 말을 인용하고, 베네딕토처럼 옷을 입으며, 요한 바오로 2세처럼 젊은이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동시에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보수파)과 제임스 마틴 예수회 신부(진보파)를 모두 만나, 그 일정들을 공개했다.
그는 양 날개의 깃털을 모두 어루만지고 있다. 지금까지 비행은 순항 중이며, 그가 난기류를 다룰 능력이 있는 조종사임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가 어떤 방향으로 비행하려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