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뉴욕대교구장 티머시 돌런 추기경은 성 패트릭 대성당(St. Patrick’s Cathedral)에 새로 의뢰된 대형 회화를 공개했다. 성당 146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신작 성미술이었다.
언론은 이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反이민 정책에 대한 ‘예술적 도전장’으로 치켜세웠다. 작품의 제목은 「평화, 사랑, 이해가 뭐가 그렇게 우스운가 (What’s So Funny About Peace, Love and Understanding)」였다.
64세의 화가 아담 치비야노비치(Adam Cvijanovic)는 베이비붐 세대 출신으로, 그 제목만으로도 1960년대 反문화적 정신이 고딕 양식의 장엄한 성당 한가운데 ‘좌정’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작품을 홍보한 큐레이터 수잔 가이스(Suzanne Geiss)는 이를 프란시스 베이컨의 섬뜩한 교황 초상화들에 비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작품은 언론의 과장과는 거리가 있다. 작품이 크다는 점은 맞지만, 그것은 오르간 루프 아래 입구 벽면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조명을 끄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높이 25피트라 해도 성당의 중앙 신랑(nave)은 100피트에 이른다. 화면 속 인물 대부분이 이민자들이지만, 선동적이지 않다. ‘수용소’가 아니라 ‘군중’이다.
그 위에는 아일랜드 녹 성모 발현(Our Lady of Knock)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성 요셉, 성 요한 사도, 두 천사, 그리고 제단 위의 어린양이다. 표현은 전통적이지 않지만 시각적으로 경건함이 느껴진다.
뉴욕 소방관과 경찰관들을 그린 패널에서는 천사가 FDNY와 NYPD 모자를 하늘로 들어 올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이 그나마 ‘성스러움을 희화화한 것’에 가장 가까운 요소다. 전체적으로는 베이컨보다는 노먼 록웰의 「유엔 회화」에 더 가깝다. 즉, 일상 속에서 마주칠 법한 인간 외양의 다양성을 시각적으로 찬미한 작품이다.
이러한 다양성의 찬미는 오늘날 세속사회에서는 흔하지만, 종교미술에서는 여전히 보기 드문 일이다. 치비야노비치는 두 천사를 그렸는데, 한 명은 흑인, 한 명은 백인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당연한 설정일지 몰라도, 성당 미술에서 인종이 다른 천사를 본 기억은 거의 없다.
화면에는 두 무리의 이민자들이 있다. 오른쪽에는 19세기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배를 타고 도착하는 모습이, 왼쪽에는 전 세계 각지에서 온 현대의 이민자들이 언덕을 내려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인종적 다양성은 뉴욕 지하철 F 라인에서 볼 수 있는 정도다. 그러나 교회의 ‘보편성’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드러낸 미술은 드물다.
입구, 즉 성당의 현관(narthex)에 이 작품이 설치된 것은 상징적으로도 적절하다. 돌런 추기경은 “이민에 대한 입장을 밝히려는 거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민자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논박의 여지가 없는 진리이며, 그 메시지는 그대로 작품의 정조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부드럽고, 하늘은 평온하며, 배경의 금빛 막대들은 성화(icon)의 황금 배경을 다소 낯설게나마 연상시킨다.
물론 이 작품이 비판의 여지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이고 인도적이며 휴머니즘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초월적 가치, 곧 신적 차원을 암시하는 데에는 서툴다. 제단 위의 어린양은 화면의 한 귀퉁이에 비껴 있다. 화가가 신자였다면 중심에 두었을 주제다.
화면 속 군중 가운데 누구도 위의 발현 장면에 주목하지 않는다. 발현은 다른 인물들과 아무 상호작용이 없는 ‘붙여넣기’처럼 보인다. 예술가는 그 종교적 비전이 이민자들과 어떤 연관을 갖는지를 보여주지 못하며, 아마 애초에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배경의 금빛 막대 역시 신성을 암시하려는 시도이지만, 각지고 인공적이며 결국 무의미해 보인다. 하느님과의 관계 결핍은 인물들 사이의 관계 결핍으로 반복된다. 그들은 대부분 홀로 서 있거나 아이 한두 명만 돌볼 뿐, 공동체의 연대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밝은 조명 아래 이 그림들은 성당의 기존 예술과 다르지만, 거슬리지는 않는다. 성 패트릭 대성당이 수십 년간 진행해 온 대대적 복원 사업의 마지막 조각이기 때문이다. 한때 이 성당은 완전히 달랐다. 조용하고 어둡고 회색빛 석조 공간, 마치 동굴처럼 느껴졌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짙푸른 빛과 촛불의 황금빛만이 그 어둠을 깼다.
1980년대 PBS 시리즈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에서 조지프 캠벨은 이렇게 말했다.
“51번가와 5번가의 교차로에서 성 패트릭 대성당으로 들어서면, 가장 분주하고 물질주의적인 도시에서 단숨에 떠나온 듯하다. 그곳의 모든 것이 영적 신비를 말해 준다.”
이제 그 ‘다른 세계’의 감각 — 세속을 떠나 성스러운 곳에 들어왔다는 느낌 — 은 거의 사라졌다. 화려한 리노베이션이 모든 표면을 반짝이게 만들면서 말이다. 발을 딛는 그 자리마다 ‘거룩함’보다 ‘가격’이 느껴진다. 제곱피트당 1,000달러가 넘는 공사비를 자랑했을 정도다.
바닥과 의자는 고급스럽고, 조명은 부드럽고 은은하며, 모든 것이 호화스럽다. 신자들의 손때가 묻은 돌은 미세 연마기로 닦아내었고, 창문과 석조의 먼지도 사라졌다. 금이 간 곳, 찍힌 곳, 얼룩진 곳은 모두 복원되거나 교체되었다. 흰 페인트가 칠해져 공간은 새것처럼 밝아졌고, 어둠은 추방되었다. 이제 안으로 들어설 때 눈이 어둠에 적응할 필요가 없다. 입구는 거대한 유리문으로 바뀌어 길가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성당 안에서도 밖의 버스와 택시를 셀 수 있을 정도다.
윤이 나는 석재, 매끈한 목재, 완벽한 조명, 깨끗한 표면은 성당을 마치 인근의 티파니, 삭스 5번가, NBC 스튜디오와 비슷한 분위기로 만든다. 경건함은 줄고, 개방된 문으로 인해 침묵은 약화되었으며, 어둠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더 많이, 더 큰 소리로 말하고, 더 많은 사진을 찍고, 더 많은 셀피를 남긴다. 밝은 조명 아래서 사진이 잘 나오기 때문이다. 성당 직원들은 잃어버린 분위기를 되살리려 그레고리오 성가를 틀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 음악 위로 이야기를 나눈다.
이 ‘기업화된 성당’에서 예술은 불가피하게 일종의 ‘브랜딩’처럼 느껴진다. 냉소적으로 보면, 치비야노비치의 작품은 2025년판 ‘뉴욕 가톨릭 브랜드’에 불과하다. 다양성, 이민, 공공봉사자, 성모 발현, 19세기 아일랜드에 대한 향수, 그리고 막대한 자금과 세련된 취향이 그것이다.
물론 돌런 추기경이 모든 것을 잘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필자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옛 성 패트릭’의 정취를 원한다면, 5번가를 따라 올라가 ‘성공회 성 토마스 교회’를 찾으면 된다. 그곳은 여전히 어둡고 돌로 된 ‘기도의 동굴’이다. 그러나 텅 비어 있다.
반면 성 패트릭 대성당은 미소 짓는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돌런 추기경은 가치 있는 협력관계를 맺고, 아름다운 공간을 복원했으며, 세상을 초대했다. 그리고 세상은 실제로 찾아왔다. 교회의 문을 열어두기 위해 세속과 손을 잡는 일에 대해 오래전부터 순수주의자들이 불평해 왔지만, 이번에는 말 그대로 ‘문을 열어 둔’ 셈이다.
「평화, 사랑, 이해가 뭐가 그렇게 우스운가」는 새로 단장된 성 패트릭 대성당과 잘 어울린다. 약간의 수정만 거치면 애버크롬비 앤 피치(Abercrombie & Fitch)나 록펠러 센터, 혹은 유엔 본부에도 걸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적 미드타운 양식’이라 부를 만하며, 미드타운의 성당에는 어울린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눌 소재를 제공하고, 누군가에게는 이민자에 대한 연민이나 녹 성모 발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이는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을 반영하는 환영할 만한 거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시대의 곤경을 증언하기도 한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부유하면서도 전 세계의 가난한 이들과 예술가, 공무원, 비전가, 후원자가 함께하는 교회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문 위에 걸린 간판이 성 패트릭 교회를 '레스토레이션 하드웨어(미국의 고급 가구회사)의 공식 기도 파트너'라고 선포하는 날이 올까 두려워한다.
우리는 점점 세속화가 우리의 신앙적 비전을 무력하고 무의미하게 만들고, 성미술을 자기중심적 브랜드로 전락시키며, 교회에서조차 기도하기 어려운 시대 속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느낀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